당파성론이란, 조선시대의 문화가 수준이 낮고 고루하다는 전제하에, 조선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자기들끼리 서로 늘 싸웠기 때문이고, 그 단적인 예가 士禍와 黨爭이며, 이는 좋지 않은 民族性의 所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던 기간 중에 조선시대의 문화 전통은 近代化의 명목 아래 모두 부정되고 단절되었으며, 처참한 시대를 살던 당시인들의 自己 卑下 의식과 연결되어 이 주장은 우리 민족에게 쉽게 먹혀들었다.
조선왕조의 정치를 본격적으로 정리하면서 비판한 저술로는 1890년대에 小論系의 李建昌이 쓴 <<黨議通略>>이 있다. 거기서 그는 宣祖代의 東·西分黨으로부터 英祖代의 蕩平策 시행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였으며, 이는 19세기 말엽 당시 국내외 정세로 보아 양반 벌열 중심의 정치는 이제 극복되어야 한다는 반성 위에서 쓰여진 것이다.
조선 왕조의 정치에 대하여 '黨爭'이라는 용어를 써서 규정하고 이를 매도하기 시작한 것은 1907년에 간행된 幣原坦의 <<韓國政爭志>>였다. 3·1운동 이후 小田省吾, 瀨野馬熊, 麻生武龜 등은 당파성론의 적용 범위를 더욱 넓혀나갔다. 일인들의 이러한 공세 앞에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우리의 近代史家들도 조선 문화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았다. 民族史家들은 조선이 왜 망했느냐는 것을 찾기에 급급하여, 그 직전 시대인 조선문화에 혐오감을 표시하였다. 계급투쟁적 사관을 받아들인 社會經濟史家들은 조선의 유교문화는 곧 兩班文化라고 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現代史硏究者들은 조선 말기의 모순에 찬 사회를 곧 조선문화라고 인식하고 그 전통적 장점은 외면하고 말았다.
士禍와 黨爭은 한 시대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생겨난 역사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은 당파성론을 의식하여 조선시대의 사화, 당쟁을 연구하지 않고 외면해 왔다. 다만 당파성론을 비판하라고 하면 막연히 관직의 수는 적은데 사람은 많기 때문에 관직 다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답하고 더 이상의 말이 없다.
과연 이것이 옳은 답이며 '관직 다툼'이 그 본질인가? 당파성론을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정치사의 올바른 체계화가 필요하며, 우리 전통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만 새로운 시각으로 조선 문화를 볼 수 있다.
16세기 전반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士林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중에 戊午士禍(연산군 4년, 1498), 甲子士禍(연산군 10년, 1504), 己卯士禍(중중 14년, 1519), 乙巳士禍(명종 즉위년, 1545)를 4대 사화라고 한다. 과연 이는 추악한 黨爭의 前奏일 뿐인가? 그러나 이는 단순한 권력 싸움이 아니다.
조선 초기 중앙 관료층의 시초를 이룬 급진적 新進士大夫들은 서울로 이주 정착하여 科田의 1/10租와 祿俸으로 생활하였다. 그런데 그 중 일부 관리들은 중요 관직을 세습, 독점하는 경향을 보였고, 그들은 公商인 六矣廛, 官匠制 手工業者 등과 연결하여 각종 이권에 개입함으로써 특권적 이익을 취득하였다. 그리하여 초기 왕권에 봉사하던 官學派는 점차 特權 勳舊大臣으로 전환해나갔다.
한편 고려말에 대부분의 보수적 신진사대부들은 鄕村地主의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 중 상당수는 私田革罷를 반대하다가 被殺되거나 落鄕하였다. 이들은 신분적으로 兩班인 外方居住 品官層(고려의 前職品官)으로서, 지방 각지에 自治的 성향의 留鄕所를 설립하여 향촌 사회를 장악하고, 중앙에서 파견되어오는 지방수령들과 갈등을 겪었다.
그런 속에서 15-16세기에 걸쳐 농업 기술이 발전하여 전국적으로 連作常耕法이 실시되고 洑나 堤堰이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지방에 많은 잉여농산물이 생성되자 상업과 수공업이 발전되어, 전국 각지에 5日場과 같은 정기적 地方場市가 생기고 비단, 銀, 綿布 등의 거래가 일어났으며, 곳에 따라서는 倭와의 대량 貿穀이나 銀鑛 개발 등으로 커다란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자 기성 관료들은 지방의 새로운 財源들을 권력으로 차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地方士族들은 鄕村에 중앙 權勢家의 권력이 미치는 것을 방어하고자 하여, 15세기 후반부터 중앙조정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士林派라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였다. 사림파 관료들은 주로 言官으로 입사하여 正統性理學의 기치를 들고 척신계열의 非理를 공격하였으며, 鄕村 자치 질서의 수립을 더욱 강화해 나가기 위하여 鄕射禮, 鄕飮酒禮, 鄕約을 시행하고 科田法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그들 양자간의 충돌로 인하여 몇 차례의 큰 사화가 일어났으나, 지방의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연이어 올라오는 사림들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16세기 중후반에는 특권적인 훈구대신들이 소멸되고 사림파의 승리로 귀결되어, 조정에는 정통 성리학에 기반을 둔 새로운 朋黨政治의 기풍이 진작되었다.
그리하여 朋黨은 宣祖代(1567-1608)에 발생하였으며, 그들은 學緣에 의거하여 나뉘어져 상호간에 서로 다른 정책 대립의 면모를 보였다. 西人은 李珥 학통으로서 時務에 능하였고, 南人은 李滉 학통으로서 향촌 자치의 보장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北人은 曺植·徐敬德 학통으로서 山林儒라 하여 재야 비판세력으로 존재하였다. 이들은 壬辰倭亂의 대처 방식에서도 서로 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光海君代(1608-1623)에는 北人들이 임진왜란 중 의병 활동으로 정치적 우세를 획득하여 집권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주도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는 우리 여건으로 보아 유익한 것이었으나, 당시의 여론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학파적 순수성을 확보하는데 취약점을 드러내어, 왕권을 무리하게 강화하는데 주력하다가 결국 廢母殺弟라는 반인륜적 행위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西人이 주동하고 南人이 동조하여 北人을 타도함으로써 仁祖(1623-1649) 反正이 일어났다. 그 후 서인과 남인은 상호 인정 下에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구축하여 朋黨政治를 운영해나갔다. 이 당시에 지방에는 書院과 鄕約이 발전하고, 학문의 領袖인 山林이 중심이 되어 與論을 主宰하는 독특한 정치 형태를 보여주었다.
그와 아울러 禮學이 발전하였으니, 이는 성리학적 사유 방식을 정치뿐만 아니라 실생활에까지 응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탄력적인 외교에 실패하여 병자호란이 발생케 하였으며, 淸朝 개국 이후에는 華夷論에 의거하여 쇄국정치를 하였다.
顯宗年間(1660-1674)에는 왕실의 服喪問題를 둘러싼 儀禮 절차를 놓고 爭訟하는 禮訟이 일어났다. 당시에 西人은 士庶禮와 王朝禮를 구별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으며, 반면에 南人은 王朝禮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런 것이 곧 이른바 '黨爭'의 전형적인 형태였다고 할 수 있으니, 이는 곧 性理學的 名分論이 정치 사회에 철저하게 반영됨으로써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은 당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상대 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었으니, 이는 言路를 존중하는 정신이 극도로 발전된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肅宗代(1675-1720)에 이르러 왕이 黨爭을 이용하여 두 세력을 견제하면서, 王權의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왕과의 親疎關係 여하에 따라 명분 없는 정권 교체가 잦아지자 붕당정치의 모순이 露呈되어, 각지에 書院·祠宇가 濫設되고 同族部落이 성행하였으며, 학문적 성취보다 벼슬 高下나 門中關係가 더욱 重視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사회가 상업자본이 발달하여, 名分爲主의 사회로부터 實利爲主의 사회로 전환되고 있던 것과도 관계가 있었다. 그에 따라 정치도 이익 집단을 배경으로 한 정당 구조로 변화해야 하였으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英祖(1725-1776) 초년에는 당파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대립이 심각하게 되어 왕이 蕩平策을 실시하기에 이르렀으나, 학문 배경이나 정책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은다고 해서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탕평책의 실시란 곧 성리학적 정치 질서의 한계성을 自認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고, 오히려 그 부작용으로 인하여 19세기의 勢道政治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당쟁 또는 붕당정치 자체가 조선 왕조 패망의 원인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그것은 농업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발전된 정치 형태의 하나였으며, 조선 왕조의 청렴성은 그로 인하여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오래 지속된 폐쇄적인 쇄국정치, 명분 정당이 아닌 이익 정당 출현의 지연 등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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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것 아닌 문제로 서로 권력 쟁탈하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퍼왔습니다. 제 생각과도 일치하며 글 새로 쓸려니 귀찮아서 그냥 퍼왔습니다. 붕당 정치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묶어서 이런 성격이다 규정하기에는 그 성격이 다른지라 붕당의 시작, 그리고 발전, 변질 그리고 쇠퇴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그건 이미 댓글에서 썼으니. 한문은 알아서 찾아 읽으세요.
그리고 이건 구양수의 붕당론입니다. 스스로 찾아볼 생각을 안하시는 듯해서 직접 구해 드리죠. 지식 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_-;;
붕당론 해제
朋 黨 論 (解題)
歐 陽 修
臣聞朋黨之說 自古有之 惟幸人君辨其君子小人而已 大凡君子與君子
以同道爲朋 小人與小人 以同利爲朋 此自然之理也.
(신문붕당지설 자고유지 유행인군변기군자소인이이 대범군자여군자 이동도위붕 소인여소인 이동리위붕 차자연지리야.)
“신이 듣자온 바에 의하면 붕당의 설은 옛날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임금 된 자가 그 군자와 소인을 분별할 수만 있다면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무릇 군자들 사이에는 道, 즉 主義(주의)가 같음으로 무리를 이루고, 소인과 소인은 이익을 같이 함으로 무리를 이룹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註釋
①朋黨(붕당) 당파
②辨(변) 분별하는 것
③論語 里人篇에,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군자유어의 소인유어이”)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
然臣謂 小人無朋 惟君子則有之 其故何哉 小人所好者 祿利也 所貪者 財貨也 當其同利之時 暫相黨引 以爲朋者爲也 及其見利而爭先 或利盡而交疎 甚者反相賊害 雖其兄弟親戚 不能相保 故臣謂小人無朋 其暫爲朋者僞也.
(연신위 소인무붕 유군자칙유지 기고하재 소인소호자 녹리야 소탐자 재화야 당기동리지시 잠상당인 이위붕자위야 급기견리이쟁선 혹리진이교소 심자반상적해 수기형제친척 불능상보 고신위소인무붕 기잠위붕자위야.)
“그렇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소인은 붕당이 없고 군자만이 붕당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소인이 좋아하는 바는 녹리이며 탐하는 바는 재화입니다. 그 이익을 같이할 때를 당하여 잠시 서로 당인하여 벗이 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 利를 보기에 이르러서는 앞을 다투며, 혹 이가 다하면 사귐이 성기어지고 심한 사람은 도리어 서로 적해하여, 비록 형제 친척이라도 능히 서로 보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소인은 벗이 없으며, 잠시 벗이 되는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합니다.
註釋 (이 章은 歐陽修의 小人의 朋黨에 대한 說明)
①黨引(당인) 자기 편으로 이끄는 것
②交疎(교소) 사귐이 성기어지는 것
③賊害(적해) 상대방을 해치는 것
④祿利(녹리) 관리의 지위에 수반되는 녹봉 등의 수입
첫 구절은(“그러나 신은 소인은 벗이 없고 오직 군자만이 벗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뜻
君子則不然 所守者道義 所行者忠信 所惜者名節 以之修身 則同道而相益 以之事國
則同心而共濟 終始如一 此君子之朋也 故爲人君者 但當退小人之爲朋 用君子之眞朋 則天下治矣
(군자칙불연 소수자도의 소행자충신 소석자명절 이지수신 칙동도이상익 이지사국
칙동심이공제 종시여일 차군자지붕야 고위인군자 단당퇴소인지위붕 용군자지진붕 칙천하치의)
군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키는 바는 도의요, 행하는 것은 충신이요, 아끼는 바는 명절입니다. 이것으로써 몸을 닦으면 곧 도를 함께하여 서로 이익되고, 이것으로써 나라를 섬기면 곧 마음을 같이하고 함께 구제하여 처음과 끝이 한결같습니다. 이것이 군자의 벗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 된 자가 마땅히 소인의 위붕을 물리치고 군자의 진붕을 쓴다면 천하는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된 자가 마땅히 소인의 위붕을 물리치고 군자의 진붕을 쓴다면 천하는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註釋 (이 章은 歐陽修의 朋黨論의 結論)
①忠信(충신) 진실하고 믿음이 있는 것
②名節(명절) 명예와 절조
③僞朋(위붕) 거짓 붕당
堯之時 小人共工驩兜等四人 爲一朋 君子八元八愷十六人 爲一朋 舜佐堯 退四凶小人之朋 而進元愷君子之朋 堯之天下大治 及舜自爲天子 而皐蘷稷契等二十二人 並列于朝 更相稱美 更相推讓 凡二十二人 爲一朋 而舜皆用之 天下亦大治
(요지시 소인공공환두등사인 위일붕 군자팔원팔개십육인 위일붕 순좌요 퇴사흉소인지붕 이진원개군자지붕 요지천하대치 급순자위천자 이고기직계등이십이인 병열우조 갱상칭미 갱상추양 범이십이인 위일붕 이순개용지 천하역대치)
요임금 때 소인인 공공, 환두 등 네 사람이 한 붕당이 되고, 군자인 8원, 8개 16인이 한 붕당이 되었습니다. 순이 요를 보좌하여 사흉소인의 붕당을 물리치고 원, 개 등 군자의 붕당을 인진하여, 요의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순이 스스로 천자가 되기에 이르러 고요, 기, 직, 설 등의 22인이 아울러 조정에 열거해 있어, 더욱 서로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더욱 서로 추양했습니다. 무릇 22인이 한 붕당이 되고, 순이 모두 기용했는데 천하가 또한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註釋 (이 章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그 진실성을 증명)
①八元(팔원) 伯奮, 仲堪, 叔獻, 季仲, 伯虎, 仲熊, 叔豹, 季狸의 여덟 사람
②八愷(팔개) 蒼舒, 隤敱, 禱戭, 大臨, 尨降, 庭堅, 仲容, 叔達의 여덟 사람
③사흉(사흉) 共工, 驩兜, 三苗, 鯀 등의 네 소인
尙書 舜傳에 “공공을 유주에 귀양보내고, 환두를 숭산에 추방하고, 삼묘를 삼위에서 죽이고, 곤을 우산에사 죽였으니 사흉을 벌함으로써 천하가 모두 복종했다.”
④皐夔稷契(고기직설) (고는 고요로 형법관장, 기는 음악을 맡고, 직은 후직으로 농업을 관장하고, 설은 교육을 맡았다.)
書曰 紂有臣億萬 惟億萬心 周有臣三千 惟一心 紂之時 億萬人各異心 可謂不爲朋矣 然紂以此亡國 周武王之臣 三千人爲一大朋 而周用以興
(서왈 주유신억만 유억만심 주유신삼천 유일심 주지시 억만인각이심 가위불위붕의 연주이차망국 주무왕지신 삼천인위일대붕 이주용이흥)
상서에 이르기를 “주는 신하가 억만이 있었으나 오직 억만 마음이었으며, 주나라는 신하가 삼천이었으나 오직 한 마음이었다.”했습니다. 주 시대에는 억만 인이 각각 마음을 달리하여 붕당이 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래서 주는 망했습니다. 주 무왕 때에는 삼천명의 신하가 하나의 큰 붕당을 이루었으니 주나라가 이로써 일어났습니다.
註釋 (이 章은 尙書 泰誓 上篇을 인용. 殷周革命을 예로 군자의 붕당의 필요성 강조)
①紂(주) 殷나라 마지막 임금. 妲己를 총애하여 학정을 삼다가 나라를
망친 폭군
後漢獻帝時 盡取天下名士 囚禁之 目爲黨人 及黃巾賊起 漢室大亂 後方悔悟 盡解黨人而釋之 然已無救矣
(후한헌제시 진취천하명사 수금지 목위당인 급황건적기 한실대란 후방회오 진해당인이석지 연이무구의)
후한 헌제 때, 천하의 명사를 모두 취하여 이를 수금하고 지목하여 당인이라 했습니다.
황건적이 일어나고 한실이 크게 어지러워지기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뉘우치고 당인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구할 수 없었습니다.
註釋 (이 章은 漢나라 黨錮事件에 관해 말하며, 歐陽修의 착오로 당고사건은 헌제의 3대 前인 桓帝 말년에 일어났다. )
①黨錮事件(당고사건) 후한 말 환관의 위세를 배경으로 지방에서 횡포부리
는 호족들을 환관이 천자께 아뢰어 그 지방의 명사들을 형벌에
처하는 사건. 대신들의 간언으로 그들은 죽음만을 면하고 향리
에 금고된 사건)
後漢書 黨錮傳에, 황건적의 亂을 일으키자 환관 여강이 靈帝에게
당고를 풀어 줄 것을 건의하여 당고를 해제했으므로, 이는
獻帝 이전의 일이다.
②黃巾賊의 亂(황건적의 난) 후한 영제 광화 6년. 중앙은 관료, 외척, 환관
의 대립이 격화되어 민중은 빈곤하고 질병, 기근, 천재가 계속되
자, 태평도 교주 장각은 우길의 가르침과 민간의 신앙을 바탕으
로 태평세대를 주창하며, 머리에 황건을 쓰고 태평도에 의해 뭉
쳐진 신도를 이끌고 난을 일으킴.
唐之晩年 漸起朋黨之論 及昭宗時 盡殺朝之名士 或投之黃河曰 此輩淸流 可投濁流 而唐遂亡矣
(당지만년 점기붕당지론 급소종시 진살조지명사 혹투지황하왈 차배청류 가투탁류 이당수망의)
당나라 만년에 붕당의 논란이 점점 일어나고 소종 때에 이르러 조정의 명사를 모두 죽였습니다. 혹자가 이를 황하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이 무리는 청류이니 탁류에 던지는 것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당나라는 드디어 망하고 말았습니다.
註釋 (이 章은 당나라 말기의 붕당을 설명)
①漸起(점기) 점점 일어나는 것
②淸流(청류) 여기서는 사람에 있어서 맑은 무리
③濁流(탁류) 황하의 흐린 물결
夫前世之主 能使人人異心不爲朋 莫如紂 能禁絶善人爲朋 莫如漢獻帝 能誅戮淸流之朋 莫如唐昭宗之世 然皆亂亡其國
(부전세지주 능사인인이심불위붕 막여주 능금절선인위붕 막여한헌제 능주륙청류지붕 막여당소종지세 연개난망기국)
대저 전세의 임금 가운데 능히 사람마다 마음을 달리하게 하여 붕당을 만들지 못하게 했던 사람은 주만 같음이 없었습니다. 능히 착한 사람이 붕당을 만드는 것을 금절한 사람은 한헌제만 같음이 없었습니다. 능히 청류의 붕당을 주륙한 것은 당소종의 세상만 같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를 난망케 했습니다.
註釋 (이 章에서도 歐陽修는 唐 昭宗 때 淸流들을 죽였다 했지만, 昭宗
이 아니라 昭宣帝 때의 權臣인 朱全忠 이었다.)
①前世(전세) 前代를 말한다.
②誅戮(주륙) 죽이는 것
更相稱美推讓 而不自疑 莫如舜之二十二臣 舜亦不疑而皆用之 然而後世 不誚舜爲二十二人朋黨所欺 而稱舜爲聰明之聖者 以其能辨君子與小人也
(갱상칭미추양 이불자의 막여순지이십이신 순역불의이개용지 연이후세 불초순위이십이인붕당소기 이칭순위총명지성자 이기능변군자여소인야)
서로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추대하고 양보해서 스스로 의심하지 않은 것은, 순임금의 22신만 같음이 없으며, 순도 또한 의심하지 않고 모두 등용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서 순임금이 22인 붕당의 속인 바 됨이 아니라고 꾸짖지 않았으며, 순이 일컬어 총명한 성자라고 하는 것은 그 능히 군자와 소인을 분별한 때문입니다.
註釋 (이 章은 尙書 泰誓 上篇을 인용. 殷周革命을 예로 군자의 붕당의 필요성 강조)
①誚(초) 꾸짖는 것
周武之世 擧其國之臣三千人 共爲一朋 自古爲朋之多且大 莫如周 然周用此以興者
善人雖多而不厭也 夫興亡治亂之迹 爲人君子 可以鑒矣
(주무지세 거기국지신삼천인 공위일붕 자고위붕지다차대 막여주 연주용차이흥자
선인수다이불염야 부흥망치란지적 위인군자 가이감의)
주무의 세상에서는 그 나라의 신하 3000명을 들어 함께 한 붕당을 만들었으니, 옛날로부터 붕당의 많고 큰 것이 주나라만 같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나라가 이로써 일어난 것은 착한 사람이 비록 많을지라도 싫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저 흥망치란의 자취는 인군 된 자가 거울삼아야 할 것입니다.
註釋 (이 章은 주무왕의 예를 들어 붕당의 문제없음을 강조)
①鑒(감) 거울로 삼아서 참고한다. ( 故事成語 殷鑑不遠 參照) 鑒 = 鑑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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