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의 비극

▲ 우당 이회영
ⓒ2004 우당기념사업회
나라가 외침 당했을 때 피지배 백성들은 대체로 세 부류로 나뉜다.

외세에 과감히 맞서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겠다는 의로운 무리가 하나요, 그와 반대로 외세에 굴복하여 그 앞잡이가 되어 동족 위에 군림하는 민족 반역의 무리가 또 하나요, 마지막 하나는 좌고우면하면서 가족이나 일신의 보신에만 급급하면서 살아가는 무리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을 때 외세에 맞서 과감하게 싸웠던 분들이 전면에 나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 침략 기간 동안 동족을 괴롭혔던 반민족 행위자들을 찾아서 처벌했어야 정의가 넘치는 반듯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데 바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독립운동사에 까막눈이었던 필자가 최근 5년여 동안 국내외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고,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만나 증언을 듣게 됐다. 그리고 먼지 묻은 독립운동사 책장을 펼친 탓으로 어슴푸레하게나마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옛 글에 "집이 가난해지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라고 했다. 즉, 진짜 애국자는 국난을 당할 때 나라를 구하겠다고 온몸과 재산을 바친 분들이다.

필자는 항일유적 현장을 답사하고 묵은 책장을 넘기면서, 일제 강점기 동안 온몸으로 맞선 여러 훌륭한 어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뜨거운 겨레 사랑과 나라 사랑에 감동했으며 그들과 같은 한민족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러웠다. 그분들의 정신이 이어지기에 우리 나라는 앞으로도 무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보고 들은 것이 적어서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나라 삼대 항일 명문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왕산(旺山) 허위(許蔿),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집안이라고 한다.

세 집안 모두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망명길에 올라 만주의 언 땅에다가 조국 광복의 씨앗을 뿌리는 데 앞장 섰다.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 우당의 주도로 세운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옛 터(2004년 5월 필자가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2004 박도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려 하자 우당은 이동녕, 이상설 등과 함께 상소를 올리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일본과 내통한 일부 대신들이 이 조약을 맺었고 우당의 아우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은 항의 표시로 외부 교섭국장 관직에서 물러났다.

▲ 유하 현 삼원포 추가가(현 명성촌)에 있는 우당 6형제가 거처한 것으로 추정되는 옛 집 터.
ⓒ2004 박도
우당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립기지를 세울 터를 물색하기 위해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만주로 갔다. 그리고 우당 일행은 간도 용정에 머물면서 서전의숙을 설립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의 밀사를 보낸 것도 우당이 주도면밀하게 고종 황제에게 몰래 주청해 실행한 것이다.

1910년 8월 마침내 나라가 완전히 일제에 넘어가자 그해 12월 우당 6형제의 가족 40여명이 망명의 길에 올랐다(권속까지 60여명).

우당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1대 후손이다. 이 집안은 8대를 내리 판서를 배출한 삼한갑족으로, 8대의 판서 중 6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우당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가 가산을 모두 처분하여 마련한 40만냥(현 시가 약 600억원 상당)은 모두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건립 등 독립자금으로 쓰였다.

이들 우당 6형제 가족은 그해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 단동)에서 머문 후 다시 이듬해 정월 안동을 떠나 횡도천으로, 거기서 다시 출발 2월 초순에야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도착했다.

이어서 석주 일가와 일송 김동삼 일가 등 우국 망명객들이 추가가 일대에 속속 도착해 한인촌을 이루자 현지 중국인들의 의혹이 커졌다.

▲ 동삼성에 토지 매입 및 입적을 청원한 문서, 이회영과 이계동(이상룡 아우)의 명의로 되어 있음
ⓒ2004 박도
"이전의 조선인들은 남부여대로 산전박토나 일궈 감자나 심어 연명했는데 이번에 오는 한인(조선인)들은 마차 수십대에 살림을 실어 오는 걸 보면 필경 일본과 합하여 우리 중국을 치러 온 게 분명하니 빨리 꺼우리(한인)들을 몰아내 주시오"라고 현지인들이 유하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회영이 나서서 북경에서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나 협조를 구한 끝에 동포들의 입적과 토지 매매 문제가 원활히 해결됐다. 1912년 합니하에 번듯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우당 일가의 자금과 원세개의 도움으로 토지 매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로 10년간 약 3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그들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승첩에 주역이 됐다. 일찍이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당 가문을 다음과 같이 기리고 있다.

동서 역사상에 국가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 청산리 어귀에 있는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이 전투에 중견 간부로 활약했다.
ⓒ2004 박도
우당 이회영 순국 72주기 추모 및 우당 장학금 전달식
‧ 때 : 2004. 11. 17(수) 오후 3시
‧ 곳 : 우당기념관 (종로구 신교동, 전화 734- 8851~2)

* 이 기사를 쓰면서 서중석 지음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외솔회 편 <나라사랑> 104집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2004/11/15 오전 7:23
ⓒ 2004 OhmyNews

 

조국 광복에 주춧돌을 놓은 사람
순국 72주기를 맞은 독립지사 우당 이회영(2)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박도(parkdo) 기자   
▲ 우당 순국 72주기 추모식에 추모사를 드리는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2004 박도

물거품이 된 고종의 해외 망명

▲ 독립운동 당시의 우당 이회영
ⓒ2004 우당기념관
신흥무관학교가 광화의 합니하로 이주하여 전성기를 구가하던 1913년 무렵, 이회영은 동지 맹보순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일제가 이회영을 비롯하여 이시영, 이동녕, 장유순, 김형선 등을 체포 또는 암살할 목적으로 형사대를 만주로 파견했다는 내용이었다.

동지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를 피신처로 권했으나 오히려 이회영은 고국 행이었다. 피신과 아울러 독립자금을 모금코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귀국 후 잠행하던 이회영은 두 차례나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평소 몸에 밴 철저한 보안과 천우신조로 무사할 수 있었다.

아들 규학이 대원군 사위 조정구의 따님 조계진과 혼인하는 계기로, 이회영은 고종황제를 북경으로 해외 망명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회영은 고종 시종 이교영을 통해 의사를 타진하자, 황제께서 선뜻 해외 망명에 승낙하였다.

1918년 말 무렵, 일제의 작위를 거부한 민영달이 내놓은 5만원의 거금으로 이회영은 아우 시영에게 전달하여 북경에다가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마련하여 수리케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이 구체화되던 과정에 고종이 예기치 못하게 급서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의 급서는 의문점이 많았다. 당시 고종의 망명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망명정보가 누설되어 일제가 고종을 독살한 것으로 믿고 있다.

▲ 고종황제의 망명을 대비하여 북경에 마련한 황제의 임시 거처(궁내부대신 월파 조정구 대감이 지키고 있다)
ⓒ2004 우당기념관
역사의 가정은 부질없지만, 만일 이회영의 계획대로 고종이 해외로 망명, 망명정부를 세워서 대일 독립전을 선포하였다면 모든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을 것이기에 그 폭발력은 엄청났을 것이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황제가 직접 망명정부를 세웠다면 조선이 자발적으로 합방했다는 일본의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새로운 정세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우당 거처는 독립 운동가의 사랑방

1919년, 다시 북경으로 망명한 이회영은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다가 이듬해 3월, 이동녕, 이시영, 박용만, 신채호, 조완구, 이광, 조성환, 김규식 등과 북경으로 돌아왔다.

북경의 이회영 집은 독립운동가의 사랑방이 되었다. 아들 규창은 "그 당시 국내에서 뜻을 품은 청년들이 북경에 오면 부친을 뵙게 되고, 우리 집에 며칠씩 머물고 갔다"고 회상하였다.

북경에서 이회영과 자주 만났던 인물이 바로 한국 독립운동 인물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이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 노선에 주동 인물이었다.

김규식, 김창숙, 안창호, 조소앙 등은 민족주의를 고수했고, 홍남표, 성주식 등은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현섭, 김종진 등은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또 김원봉, 유석현 등은 일제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의혈단으로 직접 행동하였으니, 북경의 이회영 집은 온갖 성향의 독립 운동가들이 얽히고 설킨 인연의 사랑방이었다.

이 거처에는 시인묵객도 기거했던 바,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글에도 그 시절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북경서 지내던 때의 추억을 더듬자니 나의 한평생 잊히지 못할 한 분의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는 수년 전 대련서 칠십 노구로 민족 독립을 위하여 몸 바치고 이미 고혼이 된 우당 선생이다.

▲ 혁명열사증명서(중화인민공화국민정부 발행)
ⓒ2004 우당기념관
나는 그 어른을 소개받아서 그 분이 계신 북경으로 갔다. 부모 슬하를 떠나 보지 않았던 19세의 소년은 우당장과 그 어른의 영식 규룡씨의 친절한 접대를 받으며 월여(한 달 남짓) 묵었다.

조석으로 좋은 말씀도 많이 듣고 북만에서 고생하시던 이야기며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지는 소식도 거기서 들었는데, 선생은 나를 막내아들만큼이나 귀여워해 주셨다….
(<동아일보> 1936. 3. 13)

삼한갑족의 후예 이회영의 사상적 종착점이 아나키즘이라는 사실은 뜻밖이요,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1920년대에 50대 중반의 나이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회영은 아나키즘에 어떤 매력을 느꼈을까?
* 이 기사를 쓰면서 외솔회 편 <나라사랑> 104집과 이덕일 지음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 우당기념사업회와 눈빛출판사, 그리고 필자는 우당기념관 소장 사진을 중심으로 2005년 8. 15 광복 60돌 기념 독립운동사 사진첩을 발간할 예정으로 현재 작업 중입니다. 혹 독자 분께서 독립운동 관련 귀중한 사진 자료가 있는 분은 우당기념관으로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10-032 서울 종로구 신교동 6-22 우당기념관 전화 02-734- 8851

2004/11/22 오전 8:11
ⓒ 2004 OhmyNews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 아나키스트 이회영
순국 72주기를 맞은 독립지사 우당 이회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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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해 산다는 건 쉽지 않다

▲ 추모시를 드리는 김지하 시인
ⓒ2004 박도
나라 위해 산다는 건
쉽지 않다

드러나지 않게
자기 모두를 바쳐.

한 분
계시다

우당 그늘이 이제
내게까지 드리웠다

숨죽여
감읍한다.

- <갑신년> 김지하


지난 11월 17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당기념관에서는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72주기 추모식과 우당장학금 수여식이 있었다. 이날 추모식에는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김우전 광복회장,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을 비롯한 광복회원 및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 시인 김지하, 그리고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종걸 의원 등 우당 후손들과 내외 귀빈들로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 우당 기념관을 메운 추모객들
ⓒ2004 박도
"… 우리는 그동안 우당 선생과 그 일가의 우국단성(憂國丹誠)에 대하여 너무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모르니 후진들에게 가르치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어디에 있건, 이것은 이 시대 지식인의 책임이요, 배운 사람의 큰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나라는 그분들에게 많은 빚을 졌고, 국민은 큰 죄를 졌습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그 빚을 갚고, 죄를 용서 받으려는 것은 결코 순국하신 그분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진실로 우리 스스로의 염치를 되찾고, 그 후손들을 떳떳한 문명인의 반열에 세우기 위함입니다…."

- 우당기념사업회 홍일식 회장 기념사


새로운 시대의 대안적 인간상

다시 지난 세기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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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광복에 주춧돌을 놓은 사람


앞 회에서 삼한갑족의 후예 이회영의 사상적 종착점이 아나키즘이라는 사실은 뜻밖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 역사학자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논하면서 아나키즘을 빼면 삼국시대를 논하면서 가야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아나키즘을 공산주의의 사촌쯤으로 인식하고, 또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면서 일반인들이 아나키즘에 대해 생소하게 여기고 거리를 두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 우당 이회영 흉상(우당기념관)
ⓒ2004 박도
아나키즘(Anarchism)은 그리스어의 '아나르코(Anarchos)'에서 나온 말로, '없다(an)'와 '지배자(arche)'의 합성어로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아나키즘의 사전적 정의는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 투쟁뿐 아니라 모든 정치적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고, 국가 권력 기관의 강제 수단의 철폐를 통하여 자유·평등·형제애를 실현코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및 운동으로서, 국가나 정부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국가나 정부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신념"이다.

아나키즘을 굳이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자유연합주의' 정도가 타당하다고 하겠다. 이회영이 일제 하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개인적인 성향 이외에도 아나키즘이 독립운동 이론으로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공존의 철학이며 이타(利他)의 사상으로, 인간의 참된 해방을 지향한다. 1924년 4월, 이회영·유자명·이을규·이정규·정화암·백정기 등 6인은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또 이회영은 1925년에는 비밀결사조직 '다물단'의 배후 역할을, 1931년에는 한중 합작으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 의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흑색공포단'이라는 행동대를 조직, 일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동안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 받은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아나키스트들은 공의(公義)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쳤다. 그러면서도 결코 남을 억압치 않았고, 그에 따른 아무런 대가도 요구치 않았다. 그들의 삶은 완성된 하나의 인격체로, 개인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로 뒤덮인 이 시대에 한 대안적 인간상으로 받들 만하다.

아나키즘이 비록 역사 속에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오늘날 여성운동·반전반핵운동·녹색운동·환경운동 등에 뿌리를 내려 현재 진행형으로 역사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어두운 시대에 모든 기득권과 재산, 그리고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면서 오로지 조국의 해방과 진정한 인간 해방 운동에 앞장 선 아나키스트 이회영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다.
* 이 기사를 쓰면서 오장환 지음 <시대를 앞서 간 혁명가 유자명>과 이덕일 지음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두 분 사학자에게 감사드립니다.

* 다음 회로 <이회영> 편은 마칠 예정칩니다.

2004/11/25 오후 5:41
ⓒ 2004 OhmyNews

 

 

뜻을 이루려 죽는다면 행복이 아니겠는가
순국 72주기를 맞은 독립지사 우당 이회영 (4 : 마지막회)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박도(parkdo) 기자   
독립운동가의 '삼대 각오'

▲ 우당 이회영
ⓒ2004 우당기념관
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은 '삼대 각오'를 하였던 바, "굶어서 죽을 각오, 얼어서 죽을 각오, 적의 총에 맞아서 죽을 각오"였다고 한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1대 후손으로 8대를 내리 판서를 배출한 삼한갑족으로, 8대의 판서 중 6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지낸 명문 중의 명문 후예 우당 이회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당 부인 이은숙 여사의 수기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무진년(1928년) 여름, 하루는 가군(우당 이회영)에게서 온 편지를 보니, 급한 사정으로 규숙, 현숙(우당의 2녀 3녀)을 천진의 부녀구제원으로 보내어 성명을 홍숙경과 홍숙현으로 고쳤으니, 편지할 때엔 '구제원 홍숙경'이라고 만하면 받아본다 하시고, 당신은 규창(3남)이를 데리고 무전여행으로 상해를 가니, 혹 다소간 되거든 현아에게로 부치라고 하시고는 지금 떠나면서 부친다고 하셨으니, 세상에 이런 망창(앞이 아득함)한 일이 또 어디 있으리오.

우당 아들 이규창의 자서전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쌀이 없어 밥을 못 짓고 밤이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 아버님께서는 시장하실 텐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셨는지 처량하게 퉁소를 부셨다. 하도 처량하여 눈물이 저절로 난다며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밥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이런 처참한 광경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 동북아 지도를 펴놓고 망명을 상의하는 우당 6형제
ⓒ2004 우당 기념관
이규창은 북경 시절의 궁핍상을 '1주일에 세 번 밥을 지어 먹으면 재수가 대통한 것'이라며 북경의 제일 하층민들이 먹는 짜도미(雜豆米)로 쑨 죽 한 사발로 끼니를 때우는 때가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심산 김창숙의 자서전에도 이회영의 생활형편이 드러나 있다.

우당 이회영은 성재 이시영의 형이다. 가족을 데리고 북경에 사신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생활 형편이 몹시 어려운 모양이지만 조금도 기색을 나타내지 않아 나는 매우 존경하였다. 하루는 내가 우당 집에 찾아가 공원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자고 청하였더니 거절하였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자못 초췌한 빛이 역력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여 그의 아들 규학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틀 동안 밥을 짓지 못 하였고 의복도 모두 전당포에 잡혔습니다. 아버지께서 문밖에 나서지 않으려는 것은 입고 나갈 옷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주머니를 털어 땔감과 식량을 사오고 전당포에 잡힌 옷도 도로 찾아오게 하였다. 그 일로 우의가 더욱 친밀해졌다.


한 영웅의 최후

▲ 우당 장남 규학에게 준 백범 친필서명 사진
ⓒ2004 우당 기념관
1932년 상해에 머물고 있던 아나키스트 이회영은 일제의 감시로 활동 공간이 매우 좁아졌다. 그 타개책으로 상해를 떠나 만주를 새로운 활동무대로 삼기로 하였다. 당시 만주는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완전히 장악한 뒤라 상해보다 더 위험했지만 이회영은 오히려 그곳을 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그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1932년 11월 초, 달이 환한 밤이었다. 이회영은 아들 규창과 단둘이 상해의 황포강 부두로 향했다. 규창은 아버지를 모시고 영국 선적 남창호에 올랐다. 이회영이 자리 잡은 곳은 제일 밑바닥인 4등 선실이었다. 규창은 아버지가 무사히 안착하기를 빌면서 큰절을 세 번 올린 뒤 배에서 내렸다. 배가 대련으로 출항하는 것을 보고 규창은 동지 백정기와 엄형순에게 아버지가 무사히 떠났음을 전했다.

▲ 우당이 숨을 거둔 중국 대련 전 수상경찰서(현 대련항집단, 사진 속의 인물은 우당기념관 윤흥묵 이사)
ⓒ2004 윤흥묵
규창은 만주에서 아버지의 도착편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편지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전보가 왔다.

"11월 17일 부친이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사망"

이회영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 풍설이 구구하지만 당시 신문보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회영이 대련에 도착한 날짜는 5일로 기록되어 있고 사망한 날짜는 17일로 되어 있다. 67세의 이회영은 무려 12일간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회영은 심문을 받는 동안 한 마디도 발설치 않았다. 혹독한 고문에도 끝내 입을 다물고 본적지 조회조차 거부했다. 죽음을 각오한 항거였고 젊은 동지를 지키기 위한 칠순 노인의 의로운 투쟁이었다.

유족으로 유일하게 시신을 보았던 딸 규숙의 목격담이 이은숙 여사의 수기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에 전하고 있다.

여식 규숙이가 대련에 도착하여 바로 수상경찰서를 찾아가 저의 부친 함자를 대니, 형사들이 영접은 하나 꼼짝을 못하게 지키고는, 여러 신문지국장들이 여식을 면회하고자 청하나, 허락을 안 해 주니 어찌하리오.

▲ 우당 72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내빈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우당 손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
ⓒ2004 박도
당시 여식 22세로 저의 부친께서 모진 고문을 못 이겨 최후를 마치셨다는 의심을 가지고… 형사가 시키는 대로 시체실에 가서 저의 부친 신체를 뵈었다.

옷을 입으신 채로 이불에 싸서 관에 모셨으나 눈을 차마 감지 못하시고 뜨신 걸 뵙고 너무나 슬픔이 벅차서 기가 막힌데, 형사들은 재촉을 하고 저 혼자는 도리가 없는지라.

하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화장장에 가서 화장을 하고 유해를 모시고 신경(장춘)으로 왔으니 슬프도다.
이 기사를 쓰면서 이은숙 지음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과 이덕일 지음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서중석 지음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외솔회 편 <나라사랑> 제104집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2004/12/02 오후 11:11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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