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 / 이애리수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로다 끌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묻어놓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이애리수(오리지날)

조용필

한영애


남인수


나훈아

김정호
 

배호

이미자


국악경음악

 

김정구

윤복희

[펌]

어떤 노래든 그 노래가 탄생한 저 마다의 이유가 있고 시대적인 배경이 있다.


“황성옛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그 시절 일본경찰은 이 노래를 부르는 조선인을 발견 즉시 서(署)로 끌고 가 모진 취조를 자행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황성옛터”는 전국 각지에서 끈질기게 불려져 급기야 각 학교의 조선인 교사들에 의해 학생들에게 몰래 가르쳐지기까지 했다.
일제 강점기 망국의 한을 절절히 담아낸 명곡 “황성옛터”, 그 애절한 사연속으로 노래여행을 떠나본다.


1930년 황해도 개성.
중국대륙과 만주공연을 순회한 극단 연극사(硏劇舍)는 장기공연에서 오는 피곤을 여인숙에서 달래고 있었다.
며칠째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변변한 극장이나 공연무대가 없었던 당시로서는 넓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 공연을 하던터라, 비가 오는 날이면 자연히 쉴 수밖에 없었다.

작곡가이자 연극사의 바이올린 연주자 ‘전수린’은 무언가 말못할 답답함이 가슴을 억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며칠 전 개성공연이 끝나고 ‘왕평’과 함께 다녀온 만월대의 무너진 옛 성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휴… 나라가 망하니 누구 하나 옛 고려의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나 보네 그려.”
긴 탄식을 하며 ‘왕평’은 무너진 고려성에 무성히 돋은 잡초를 헤치고 있었다.
“다들 제 입가림하기도 바쁜데 누가 이 성을 지켜주겠어? 설령 성에 다니며 잡초 뽑고 관리한다해도 그렇지, 일본 순사놈들이 가만 두겠냐고?”
“그래도 이 성(城)하면 옛날 고려제국의 혼이 깃든 도읍진데….”
“망할 놈의 세월하구선… 예나 지금이나 유정한 저 달은 변함없는데 황성옛터엔 잡초만 우거지니, 조상 돌 볼 인심조차 잃어버린 못난 조선민이 부끄럽네 그려.”


어느 사인가 두 사람의 눈가에는 뜨거운 이슬이 맺혀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전수린’은 또닥또닥 창틀을 때리는 빗소리를 듣다말고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바이올린의 활을 잡았다. 비분하고 서러운 곡이 천천히 밤공기를 타고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건넌방에서 단원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던 ‘왕평’의 귀에 흐느끼는 듯한 여인의 노래 소리가 들린 것은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홀린 듯 노래 소리를 따라 온 ‘왕평’.
그 구슬픈 여인의 울음소리는 다름 아닌 ‘전수린’의 애조띤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소리였다.
“가만… 이 곡 잊어버리기 전에 채보해, 빨리!”
말없이 ‘전수린’의 연주를 듣고 있던 ‘왕평’은 오선지를 불쑥 건넸다.
며칠 전 개성 만월대에서 황성옛터를 바라보며 망국의 슬픔을 함께 느꼈던 두 사람이었기에 바이올린 곡조는 오선지에 옮겨졌고, 이어 오선지에는 ‘왕평’의 가사가 붙었다.

 

황성(荒城)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月色)만 고요해
폐허에 스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일우어
구슯은 버레 소리에 말 업시 눈물지어요.

 

이렇게 탄생된 “황성옛터”는 그 해 가을 단성사에서 ‘이 애리수’의 노래로 무대에 올려졌다.
슬프다 못해 절망적인 아픔으로 엄습해 오는 ‘이 애리수’의 노래에 관객들은 새삼 망국의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재창 삼창이 거듭되고 이튿날부터 이 노래는 삽시간에 입과 입을 통해 전국에 퍼져 나갔다.
이듬해 1932년 “황성옛터”는 빅타레코드사의 4월 신보에 “황성의 적(跡)”이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어 5만여장이 팔려 나갈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공연때마다 일본 순사들이 임석해 공연내용과 관객들의 반응을 사찰하여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던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 애리수’의 노래에 조선관객들이 열광하고 또 “황성옛터”를 합창하며 함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총독부는 위험을 느꼈는지 공연을 가로 막고 레코드 발매도 금지 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을 종로경찰서로 끌고 가 불온사상에 대해 혹독하게 취조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불어라데쓰네.”

순사는 두 사람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이것 보시오. 우리는 음악가지 투쟁가들이 아니오. 그런데 뭘 더 불란 말이오.”
“칙쇼! 바가야로데쓰. 늬 놈들이 노래를 통해 조선민중들을 규합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일본제국에서는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데쓰네. 그래도 거짓말 할거냐데쓰까?”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두 사람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경로를 통해 공연사찰을 해 왔던 총독부로서는 이번 기회에 조선민중을 단합시키는 노래를 발본색원하겠다는 자세로 나왔다.
“좋다데쓰네. 정히 입을 열지 않겠다면 따끔한 맛 좀 봐라데쓰요.”


‘왕평’과 ‘전수린’은 종로경찰서의 취조를 받고 유치장에 가둬져 하루를 묵은 후에야 풀려 날 수 있었다.
일본경찰은 이 노래를 부르는 조선인을 발견 즉시 서(署)로 끌고 가 모진 취조를 자행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황성옛터”는 전국각지에서 끈질기게 불려져 급기야 각 학교의 조선인 교사들에 의해 학생들에게 몰래 가르쳐지기까지 했다. 대구의 보통학교 교사는 “황성옛터”를 학생들에게 몰래 가르치다 적발되어 교단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일본의 탄압이 거세면 거셀수록 “황성옛터”의 열기는 더하게 되어 급기야 ‘이 애리수’는 “민족의 연인”으로 추앙받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심지어는 일본인들 사이에도 이 노래가 유행되어 “조센노 세레나데”로 통하게 된 것은 얼마나 이 곡이 대중들의 감성을 크게 움직였는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이 곡의 작곡가 ‘전수린’은 1907년 개성출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장로교회를 다니며 서양음악을 배웠고 송도고보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 작곡가 ‘홍난파’가 이끄는 연악회(硏樂會)에 가입했고, 1931년 시에론레코드사에서 “한숨고개”로 데뷔해 “황성옛터” “고요한 장안”등으로 스타 작곡가가 되었다.
작사가 ‘왕평’은 연극의 각본가이자 연출가이며, 또 배우뿐만 아니라 작사가등 전방위에 걸쳐 눈부신 활약을 한 만능 연예인이었다.


‘왕평’은 이미 1920년대부터 “오만원의 보물” “홍길동”등의 연극 각본을 썼고, 1933년엔 그 유명한 “항구의 일야(一夜)”를 썼다.
‘왕평’은 연극 각본뿐만 아니라 코메디(당시에는 넌센스라 불렀다) 대본을 비롯해 작사가로 배우로 이름을 떨치다 가수 ‘신 카나리아’와 함께 [남매]라는 극에 출연해 공연하던 중에 33살의 나이로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평’의 죽음은 연예.예술계 전체의 비보였다.


그래서 그의 죽음 앞에 모든 예술인들이 단합하여 ‘왕평 추모공연’을 펼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추모공연’ 및 ‘추모음반’이 기획, 제작되는 기록을 남겼다.
추모음반은 1941년 김해송(이난영의 남편:월북) 작곡 남인수 노래로 [오호라 왕평]이라는 음반제목으로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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