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 1898년9월25일 사망 1959년 7월 29일
출신지 인천광역시 강화도
직업 독립운동가
학력 주오대학
경력 1950년 제2대 민의원 1948년 제1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강화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예전에 사회주의 운동을 하였으나 전향하여... 더보기
정치적 박해의 표상으로는 해방전 공산주의 운동에 몸담았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꼽힌다.
그는 56년 3대 대통령선거에서 신익희가 급서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사실상 야권 단일후보가 되는 운명을 맞았다.
투표 결과 는 이승만 504만여표, 조봉암 216만여표.
절반도 안되는 득표였지만 조봉암의 부상은 장 기독재를 획책하던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결국 58년 1월12일, 이승만정권에 의해 간첩의 배후조종 등의 혐의로 체포된 그는 1년6개월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진보당 사건과 함께 빠질 수 없는 이름은 당시 담당판사였던 유병진 . 그는 58년 7월2일 1심 선고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된 조봉암에게 국가보안법위반만을 인정,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진보당 관 계자 전원에게 무죄를 내렸다.
이승만정권은 깡패들을 동원, 「타도 유병진」을 외치게 했 고, 결국 그는 58년말 판사직을 떠나야 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 묘 소재지-서울 중랑구 망우산 사색의길 동락천 약수터 근처

▲ 비석 뒤에 비문이 없다.
망우리 시민묘지에는 비문이 없는 묘소가 하나 있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죽산 조봉암 선생님 묘소지요.
59년 진보당사건으로 간첩혐의로 사형된 후 창령 조씨문중에서
지금까지 비문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이랍니다.
죽암은 비운의 정치인이지요.
제헌 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까지
탄탄대로였지요.
52년, 56년 대선 때 이승만에 맞서 선전했지만 낙선합니다.
그러나 무려 200만표나 얻었기에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올라섭니다.
독재자의 입장에서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나봅니다.
호시탐탐 노리다가 기어코 진보당에 붉은 색을 입혔고
죽산을 간첩혐의로 잡아들여 사형을 언도합니다.
죽산은 "정치적으로 조작된 사건이니 사형 아니면 무죄를 달라"
라고 당당하게 최후진술을 합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정치활동을 했다는 것밖에 없오.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 주시오."
그러나 그 마지막 청도 거부한 채 서대문 교도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됩니다.
밋밋한 비문이 무언의 항의를 합니다.
'X'를 그린 마스크를 착용한 것 같습니다.
조작된 사건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빨리 복원되어 선생의 이력과 철학이 가득 채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다음에 다시 올 때는 술이나 한 병 사 가지고 와야겠습니다.
마지막 유언이나 다름없는, "술이 한잔 주시오"라는 소원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개발독재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을 이루었던 기반에는, 사실 이승만 정권 시절, 당시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 선생 등의 주도로 이루어진 농지개혁이 있었던 점을 상기해야 한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진행된 당시 농지개혁은 고질적 병폐였던 지주제를 청산하고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세계사상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공평한 자작농 국가에 설정하였다. 비록 얼마 안되는 땅뙤기이지만 땅의 주인이었기에 일할 의욕이 충만하였고, 이것은 새마을운동과 산업화의 정신적인 동력역할을 했다. 즉, 경영관리요소 중 동적요소가 작동하여 기업의 이윤극대화에 성공한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