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신익희의 정치활동


구경서<정치학박사/강남대학교>

 

1. 제헌국회,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

  국가 수립의 기초가 다져지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정치제도의 정치실험인 제헌국회의원 선거는 1948년 2월 6일 UN총회 한국위원회에서는 가능한 지역에 내에 한하여 선거를 실시하라는 유엔 소총회의 제안을 표결에 붙인 결과 4대 2, 기권 2로 이를 가결하였다. 그리고 이 권한을 UN한국위원단에 부여하고 이어서 선거법을 3월 22일자로 공포하였다.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적용된 국회의원선거법은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의하여 1947년 9월 3일에 공포된 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5호 입법의원의원선거법(立法議院議員選擧法)을 골자로 하여 기초해 제정된 것이다. 이 선거법은 잠정적인 군정법령으로 대한민국 국회에서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할 때까지만 유효하였다.1)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하여 1948년 3월 17일 미군정법령 제175호로 공포된 전문 57조의 국회의원 선거법의 주용 내용을 알아보자.2)


  첫째, 선거구는 선거구 법정주의에 의거하되, 각 선거구마다 1인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로 하여, 선거구의 획정은 부․군(府․郡) 및 서울시의 구(區)를 단위로 하여 인구 15만 미만은 1개구, 인구 15만 이상 25만 미만은 2개구, 인구 25만 이상 35만 미만은 3개구, 인구 35만 이상 45만 미만의 부(府)는 4개구로 하여 총 200개의 선거구를 획정한다.

  둘째, 국회의원 임기는 2년으로 한다.

  셋째,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던자, 일본 제국의회의원이었던 자, 중추원 부의장․고문․참의원이었던 자, 부(府) 또는 도(道)의 자문이나 결의기관의 임원이었던 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었던 자, 판임관(判任官) 이상의 경찰관급, 헌병․헌병보이거나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 밀정행위를 한 자 등의 선거권을 제한한다.

  넷째, 선거인 명부는 선거구 선거거구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지정한 선거인 등록소에서 선거인의 자진등록에 의하여 작성하는 신고작성제를 채택하고, 선거권의 연령은 만21세로 한다.

  다섯째, 의원후보자는 선거인 명부에 등록한 자 200인 이상이 서명․날인한 추천장을 첨부하여 선거구 선거위원회에 등록하도록 하여 선거인추천제를 도입한다 등이 그 내용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현재의 선거법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행방 된 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에 협력한 사람은 아예 피선거권을 박탈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국회의원 후보자들은 정치적으로 검증이 된 사람만 출마가 가능한 것이었다. 또 200인 이상의 유권자들로부터 추천을 받아야 하는 것도 새롭다.

  역사적인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되었다. 한반도 유사이래 처음으로 실시되는 역사적 선거이며 동시에 한국정치사에 이정표를 세우는 선거였다. 이보다 앞서 선거법상 3월 30일, 드디어 선거인 등록이 개시되었다. 등록이 개시되자 48개나 되는 정당과 사회 단체들은 선거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선거운동에 돌입하였다. 선거일은 원래 5월 9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5월 9일 오전 20분간의 금환 일시를 고려하여 5월 10일로 연기 확정하였다. 마침내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 아래 실로 역사적인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공산당과 좌우통합파 등 총선거 자체를 거부하는 일부의 잡음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선거의 4대 원칙, 즉 비밀선거, 보통선거, 평등선거, 직접선거 등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제헌국회의원 선거 당시 입후보자는 모두 948명으로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회가 235명을 출마시켰다. 그리고 언론계 출신과 자본가 계급, 일본 및 미국 등에서 해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식인 계층 등이 조직한 보수 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이 91명을 출전시켰다.3) 그리고 대동청년당이 87명, 조선민족청년단이 20명, 대한노동총연맹이 12명, 대한 독립촉성농촌연맹이 10명의 후보를 각각 추천했다. 이밖에 기타 사회단체 및 정당이 86명의 후보자를 내세웠으며, 무소속은 417명으로 전체 입후자의 44%를 차지하여 대거 출마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무소속이 이렇게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민주당 소속 후보자의 상당수가 한민당의 인기가 없어 무소속으로 나섰기 때문이다.4)

  이와 같은 상황은 당시의 정치적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정당 및 단체가 무려 48개나 되었지만, 7명 이하의 후보를 추천한 정당이 42개나 되었다. 그리고 25개의 정당 및 사회단체는 단 1명의 후보를 추천하는데 그쳤다. 해방 후 정당과 사회단체의 난립현상과 함께 정치적 혼란을 여싱히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남북협상파와 좌익계열은 이 선거에 불참하여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노정하였다.

  선거결과 무투표는 12명이었다. 그 가운데 신익희도 과거 독립운동의 공적과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고향인 광주에서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유권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투표소 앞에 장사진을 이룬 한국정치사상 처음 실시되는 제헌국회의원 선거는 그 방법에 미숙한 점이 적지 않았지만, 전국유권자 7백 84만 여 명 가운데 1만 3천여 투표소에 전 유권자의 91%가 투표에 참가함으로써 놀라운 참여율로 민의는 성공적으로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입후자의 평균 경쟁률은 평균 8.3대 1이었다.

  투표율과 경쟁율이 이렇게 높은 것은 당시의 정치적 열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그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헌국회의원 선거는 해방이후 처음으로 실시되는 선거라는 점에서 그동안 억눌려왔던 국민들의 심리에 잠재해 있던 정치적 욕구가 한꺼번에 노출되었다. 둘째, 국민 스스로가 자신이 주권을 갖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잃은 슬픔과 수모를 겪은 국민으로서 이러한 의지는 당연한 것이었고, 이것이 제도적 장치를 통한 정치참여로 나타난 것이다. 즉, 국민들 자신의 의사에 의해서 국회를 구성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셋째, 해방과 함께 다양한 이념을 내세우는 수십개의 정다잉 조직되면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신민적(臣民的) 정치문화는 정부가 수행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심리적 작용의 결과이기도 했던 것이다.5)

  신익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되었다. 그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는 그를 무투표로 당선시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광주에서는 신익희 만큼 정치적 경력이나 경륜에 대항할만한 인물도 없었다. 지역주민들은 신익희의 무투표 당선으로 그를 한국정치의 거목으로 키울 작정이었다.6) 지역주민 대부분이 이에 동의했다. 신익희는 지역주민의 지지와 성원으로 무투표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당선의원의 소속별로는 무소속이 85석으로 가장 많았고, 신익희가 소속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으로 두 번째로 많이 당선되었다. 다음엔 한국민주당이 29석, 대동청년단이 12석, 조선민족청년단 6석 그리고 대한독립촉성농촌연맹 이 2석 등이고 기타 정당 및 사회단체에서 약간씩 선출되어 모두 198명이 당선되었다.


2.. 제헌국회와 국회의장 당선

  드디어 그렇게 갈망하던 제헌국회가 개최되었다.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당선된 198명의 선량들이 5월 31일 오전 10시에 제각기 감격 어린 표정으로 군정청 내에 마련된 임시의사당에 모였다. 임시의회의 제1차 회의는 국회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다. 우선 임시의장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국회 임시준칙에 의하여 의장과 부의장이 각각 1명씩으로 되어 있는 것을 이정래 의원의 동의로 부의장은 두 명을 뽑기로 했다. 이승만 임시의장이 의장선거를 선언하고, 의장과 부의장 선거를 단기 무기명 투표로 실시하였다. 감표위원에는 장면과 이영준 의원이 지명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이 198표 중 188표를 얻어 의장에 당선되었다. 다음은 부의장 선거에 들어갔다. 투표에 임하는 신익희는 전에 없이 흥분했지만 우선 이승만이 의장에 당선된 데 대해서는 만족했다. 개표결과는 신익희가 가장 많은 76표였으나, 김동원 69표, 이청천 33표, 이윤영 11표, 김약수 5표, 장면 2표, 이훈구 1표, 그리고 무효표가 1표씩 각각 나왔다.

  그러나 과반수 미달로 재투표가 실시되었고, 재투표는 1차 투표에서 최고 득점한 신익희와 김동원 두 사람에 대한 결선투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신익희가 116표를 얻어 80표를 얻는데 그친 김동원을 36표자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주장으로 다시 투표가 시작되었다. 투표결과 김동원이 10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부의장에 당선된 신익희와 김동원을 나란히 세우고 의원들에게 취임사를 시켰다. 이 날 오후 2시, 역사적인 국회 개원식과 함께 국회의원으로서 국회부의장으로서 신익희의 본격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 의회의 기능을 잠정적으로 행사해 오던 대한 국민대표 민주의원은 자동적으로 해산되었다. 그동안 임시의장을 맡았던 이승만은 국회의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민주의원과 함께 과도정부 입법의원도 해체명령이 내려졌고 6월 1일 군정재판도 폐지되었다. 이렇게 한국의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이렇게 건국의 기초작업이 하나하나 진행되는 동안 국회는 6월 2일 제3차 본회의를 열었다. 거기서 신생국가의 초석이 될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기초작업이 착수되었다. 제헌국회는 6월 3일 헌법과 정부조직법 등의 기초위원을 선정하였다. 이때 전형위원들이 뽑은 헌법제정에 들어갔다. 헌법기초위원장에는 한민당의 서상일 의원을 선출하였고, 정치인 즉, 국회의원이 아닌 법률 전문가들 가운데 당시 해박한 법률지식을 소유하고 있던 유진오 등 10명이 전문위원으로 뽑혔다.

  신익희는 헌법기초작업을 위하여 진작에 정경연구회를 구성하여 작업을 진행 시켰다. 신익희가 내밀하게 이끌어 오던 정경연구회는 유진오가 국회의원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하면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유진오는 행정연구반원들과 함께 헌법안 작업을 진행하였다. 오래 전부터 행정연구반 특별위원에서 작업을 진행 온 것을 유진오가 합세함으로써 헌법안 작업을 순타하게 작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의원들은 행정연구반이라는 말을 듣자 위원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 전부터 행정연구반은 신익희의 단독적인 창안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1946년 1월부터 시작되었으나 그 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이것은 신익희의 존재가 위원들 사이에 새삼스럽게 부각되는 동기가 되었다.

  여기에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권력구조문제이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기초적으로 국가운영을 대통령중심제로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각책임제로 할 것인가가 중심사였다.  헌법 기초안은 행정연구반에서 작성한 것과 권승렬이 마련해 온 것 등 두 가지였다. 검토결과 위원들은 행정연구반의 안을 원안으로 하고 권승렬 안은 참고 안으로 채택하였다. 내각책임제와 양원제, 대통령중심제에 대한 논란이 벌어진 것은 그 직후의 일이다.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지배적이었고, 허정과 이윤영 의원만이 표면적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찬성하고 나왔다.

  이승만은 한사코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을 만들어야 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이승만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이었다. 그것은 그의 정치적 승리 즉, 대통령 당선이 그의 궁극적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신익희는 끼여들지 않았다. 이승만은 내각책임제가 채택되어 이승만이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로 물러앉을 수는 없었다. 비록 고령의 나이였으나 오랜 해외망명에서 돌아와 건국의 벅찬 꿈에 부풀어 있는 그였다. 젊은이 못지 않은 정열과 패기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미국에서 오랜 기간동안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대통령제에 경도되어 있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그는 국회가 헌법의 골격을 잡아 건국 준비작업이 마무리되면 곧 정부에 들어가 자기의 포부대로 새로운 조국의 대통령으로써 국가를 운영하고 싶었다. 자칫 일이 잘못되어 자신이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초조해진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채택하려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 같은 지시에도 불구하고 헌법기초위원회는 유진오 위원의 안을 놓고 심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전문위원인 유진오는 연일 국회에 나가 그의 초안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에 낱낱이 답변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승만의 연설은 대통령중심제의 헌법채택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 바람에 위원회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봉암이 발언을 통해 이승만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것은 이승만이 다녀간 후의 기초위원들이 대체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바로 그 즈음 계동에 있는 김성수의 집에서는 서상일과 김성수가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 주장을 놓고 열띤 의논을 했다. 신익희가 그들을 찾아갔을 때 이들은 내각책임제에 대한 이승만의 반대 때문에 보다 확실해진 의회의 분위기를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다. 신익희는 김성수가 서상일과 함께 있는 것을 보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신익희는 어차피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 앉을 것이고 보면, 나중에 그가 헌법을 임의로 고칠 수도 있는 인물임을 간파하고, 헌법기초 위원회가 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해 줄 것을 건의했다.

  신익희는 선뜻 김성수의 뜻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제도를 인물에 우선할 것이냐, 인물에 우선할 것이냐, 인물에 맞추어 제도를 만들 것이냐 하는 견해 차이는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신익희와 한민당 수뇌들은 아무런 합의점도 찾지 못하고 서로의 속셈만 타진한 채 헤어지고, 신익희는 곧 바로 헌법기초위원회를 방문했다.

  행정연구반 출신인 유진오, 윤길중 등과 만나 앞으로의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유진오와 윤길중에 대하여 잠깐 알아보자. 유진오는 제헌헌법을 기초한 인물로 단편소설 『김강사와 T교수』로도 유명한 법학자출신이다. 한 때는 정계에 진출하여 신민당 총재와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까지 한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유택은 경기도 광주군(현,하남시 상산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윤길중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당 대표위원을 맡기도 했다. 신익희의 현실론에 헌법기초를 맡은 젊은 전문위원들은 신익희의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이 헌법기초 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와 있는 것은 결코 몇 푼의 봉급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전공한 헌법이론의 이상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신익희의 현실론에 헌법기초를 맡은 젊은 전문위원들은 신익희의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이 헌법기초 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와 있는 것은 결코 몇 푼의 봉급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전공한 헌법이론의 이상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신익희의 설득은 결국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정치적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헌법기초안이라는 기본적인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헌법기초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다음 재론한다면 모르되, 기초위원들 대부분의 뜻이 내각책임제로 기울고 있는 이상 그들의 손으로 이를 수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익희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한민당과의 타협에서도 전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고, 전문위원들의 의견도 한결같자 장차 일어난 일들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고 돌아가는 대세를 관망할 수는 없었다. 임시정부 시절에 외국인과의 어떤 교섭에서도 지금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나, 유진오가 작성한 원안은 제1독회에서 약간 손질한 다음 위원회를 무난히 통과했다. 신익희는 더욱 걱정이 되었고, 이승만의 불쾌한 감정은 극도로 고조되고 말았다.

  6월 21일 열린 제15차 국회 본회의에서는 헌법기초안의 상정을 앞두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비록 한민당이 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본회의에서는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회 소속 의원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동원해서 본회의 통과를 저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국회부의장 신익희는 이승만의 완강한 주장에 눌려 그의 제의를 표결에 부쳤으나 표결 결과는 이승만의 패배였다. 재적의원 175명 가운데 찬성이 겨우 12표에 반대 130, 무효 2표, 기권 31표가 나온 것이다. 참패한 이승만은 헌법이 대통령중심제로 채택되지 않을 경우 자신은 정계에서 완전히 떠나겠다고 선언한 다음 회의장에서 나가 버렸다. 이승만이 퇴장한 후 회의장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신익희는 자신이 나설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발언대에 올랐다.


 “나는 국회의장단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헌법 제정작업에 전력한 여러분의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조금 전 이승만 의장의 발언이 여러분에게 더 없는 충격을 주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의장이 왜 그런 과격한 의사표시를 하게 되었는지 다 같이 헤아려 보아야 될 줄 압니다. 좀 주제넘은 말 같습니다만, 지금 나라 안팎의 정세를 살펴볼 때 우리가 비록 유엔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했다고는 해도 세계 우방의 신임을 얻어 신생국으로서의 첫걸음을 순조롭게 내디딜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여러분의 초안한 내각책임제가 더없이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만일 내각책임제를 시행하다가 크게 혼란이 일어난다면 이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옷도 자기의 몸에 맞지 않으면 헌옷만 못한 법입니다. 헌옷도 환경과 여건에 따라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건에 따라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난국타개라는 중대한 과제를 염두에 두시고 이 의장의 말씀을 좀더 냉철히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익희의 발언으로 회의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으나, 다행스러운 것은 이승만의 발언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면서도 어떤 정치적 절충을 꾀하는게 좋겠다는 김준연의 발언이 기초위원들 전원의 찬성을 얻었다는데 있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와 양원제의 관철을 당론으로 하고 있는 한민당의 고충은 대단했다. 이승만의 그와 같은 태도를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익희가 회의장을 떠나자 조봉암은 신익희가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대 놓고 말하기도 했다. 그날 한민당은 밤새도록 회의를 열어 김준연의 제안에 따라 헌법기초안을 수정했다. 현재의 원안에서 국무총리의 권한을 대통령 중심제가 아닌 국무총리를 두는 절충식 대통령 중심제가 아닌 국무총리를 두는 절충식 대통령중심제였다. 절충식 대통령중심제 기초안은 조봉암 등 몇몇 무소속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무사히 통과되었다. 그 문제를 놓고 겨우 한숨을 돌리던 신익희에게 또 다른 소식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이승만이 각 부처의 장관과 경찰제도에 관해서까지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서상일과 함께 국회에 있던 신익희는 이승만의 부름을 받자 어딘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신익희는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헌법기초위원들이 언제까지나 이승만의 요구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지방출신 의원들이 한마디라도 서로 더하려고 다투는 바람에 정부수립이 늦어진다며 신익희가 무소속 의원들을 잘 타일로 그런 폐단이 없게 하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말대로 무소속 의원들을 만나 교섭을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소속 의원들은 대개 이승만의 존재를 은근히 두려워하면서도 선뜻 돌아서 주지 않았다. 신익희는 이화장으로 가서 이승만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다음날 6월 29일, 국회는 큰 파란을 겪은 끝에 헌법원안에 대한 대체론에 들어갔다. 7월 4일 제2독회를 거친 헌법 전문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은 7월 12일이었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제1조로 시작한 대한민국 헌법전문 10장 107조가 제헌의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기립 박수로 통과되었다. 또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공포되어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편, 궁지에 몰린 공산당의 끈덕진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건국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어느 날, 신익희는 이승만과 마주앉아 앞으로 세워질 정부조직에 대해 자주 의견을 나누었다. 국회의장과 부의장이라는 직계에 앞서 신익희는 최근 이승만과 뜻을 같이하는 입장이었다. 이화장을 자주 드나들었던 신익희의 머리에는 착잡한 생각이 엇갈리곤 했다. 신익희는 이미 이승만의 계획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정파를 초월한 또 하나의 기구를 만들어 그것까지 손아귀에 쥐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견고하게 다질 속셈이 있었다. 신익희는 그 후에 계속 이승만의 후미에서 복잡한 사건들을 원만하게 처리해 나갔다. 사실 신익희와 이승만의 이러한 관계는 나중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그들의 개인적 퍼스낼리티(personality), 리더십의 차별성, 성장배경, 가계의 차별성 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미군기의 독도 폭격사건이 있을 때도, 신익희의 의견은 이승만에게 그대로 채택되었다. 가뜩이나 감정이 좋지 않던 미군정 사령관 하지와 이승만은 그 문제로 크게 대립했다. 결국 하지가 양보해서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다른 곳에서 더 큰 말썽이 일어났다. 전국민이 술렁거리는 판에 김구가 주동이 되어 그의 측근들이 전국민 성토대회를 열고 군정 당국과 정면충돌을 불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때 이승만 곁에서 김구측에 사람을 보내 사전에 무미해야된다고 주장한 게 신익희였다. 신익희는 어느 쪽에도 반감을 사지 않고 무난히 문제를 해결하였다.


3. 건국과 정치인들

  해방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과 반목을 보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적 행적을 좇아가다 보면 해방공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신익희, 이승만, 김구, 조소앙 등 한국 현대정치사의 초석이 대거 등장하는 이 광경을 밀도 있게 살펴 보자.

   이승만과 김구는 해방정국에서 최대의  정치적 갈등을 겪은 당사자들이다. 그들은 정치적 배경, 성장배경 등이 전혀 다른 정치거목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정치 행태와 이들 사이에서 협력관계를 모색하려 노력했던 신익희의 모습을 보면 해방공간 요약을 보는 듯하기도 하다.

   신익희는 정부수립을 눈앞에 두고 정국이 원할하게 진행되기를 바랬다. 미군정과의 갈등도 우너하지 않았다. 어차피 미군정이 한국의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 미군을 성토해서 말썽이 생기면 당연히 손해가 오는 것은 우리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군은 점령군으로 와 있으면서 한국의 정치, 경제, 군사 등 거의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이와 때를 같이하여 힘의 공백상태에서 정당, 사회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우국청년단이라는 단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로 38선 이북을 떠들썩하게 만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들은 이름에서 보여주듯이 우익들에 의해 행해지는 이른바 ‘백색테러’를 강행하는 집단이었다. 뚜렷한 지도자도 없이 다만 공산당이나 중간파들에 대한 비밀투쟁을 벌이던 그들의 목표는 김규식이었고 다음은 김구였다. 김규식은 다행히 화를 면했고 김구를 습격하려다 그들은 체포되었다. 그 문제로 정부수립을 목전에 두고 세상은 또 한번 시끄러웠다.

  그 무렵, 김구의 거처였던 경교장에는 오랜만의 방문객이 있었다. 국회부의장 신익희가 김구를 찾아온 것이다. 신익희는 이승만과 정치적 연을 맺고 있었으나 김구와의 정치적 의리는 저버리지않았다. 그가 김구를 찾아온 것은 자신이 평소 대인관계에서 원칙적으로 가지고 있던 원만함에도 그 이유가 있었지만, 김구에 대한 의리로 그 입장을 지켜주자는 뜻도 있었다. 김구는 신익희를 잘 알면서도 그가 혹시 이승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에게 어떤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신익희 역시 그런 김구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임정생활을 통해 신익희는 김구를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김구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구와 신익희가 대좌하는 순간 조완구가 들어왔다. 조완구는 김규식 테러사건에 대해 김구가 발표한 성명을 놓고 다시 한민당이 낸 반박성명의 소식을 가지고 김구를 찾아온 것이다. 조완구는 한민당의 성명 때문에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김구는 조완구에게 진정하도록 타일렀다. 신익희도 곁에서 조완구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자, 한독당을 이탈하고 이승만과 손을 잡은 신익희에 대해 평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조완구는 신익희에게 감정을 폭발시켰다. 그러나 그때 김구의 몸에 이상이 왔다. 다리가 마비된 것이었다. 잠시 상대를 겨누었던 그들의 눈은 김구에게 돌려졌다. 가슴에 박힌 총알이 오른편 허리로 돌면서 대혈관을 압박했기 때문에 오른편 다리가 잠시 마비된 것이었다. 김구의 가슴에 박힌 총알은 상해 임시정부 때 공산당원인 이운한이라는 자가 저격한 것인데 기적적으로 죽지 않았던 것이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발병은 분위기를 바꾸어 주었다. 어색했던 신익희와 조완구를 화해하도록 만들었다. 경교장을 나오면서 신익희는 몹시 답답함을 느꼈다. 조완구와의 언쟁 때문만이 아니다. 고독해 하기만 하는 김구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남북협상이 어떻든, 김구의 정치적 위 위치가 어떻든 김구는 일평생을 민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에게 민족은 하늘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김구를 심익희는 마음 속에서 늘 잊지 않고 있었다. 비록 정치적 견해와 입장은 달라도 김구에게서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익희는 이승만을 종종 찾았다. 신익희는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던 이승만과 김구가 화해하기를 바랐다. 심익희는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구국결사 동지회원들이 김구에게 주었다는 호소문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신익희는 김구가 머물던 경교장에서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올랐던 이승만과 김구를 화합시켜 보리라던 생각을 실행하려 했다. 김구가 신익희에게 보여 준 호소문을 통해 이승만과 김구가 화해 할 수 있도록 신익희와 조소앙이 노력했으나 그런 움직임에 대해 한독당이 냉담했고, 이승만 역시 귓전으로 흘려 버릴 뿐이었다. 이시영까지 나서서 애써 보았으나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 해방정국에서 정계의 두 거목 이승만과 김구의 화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익희는 그 문제로 이승만을 자주 찾아갔다. 이승만은 신익희가 자주 찾아오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는 인간적으로는 화해할 수 있으나 정치적으로는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승만은 신익희에게 김구의 말을 먼저 꺼내 신익희가 의도하는 바를 미리 봉쇄하곤 했다. 이승만은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신익희 앞에서 이승만은 김구를 칭송을 하고 나서는 다시 김구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식으로 김구와의 경원된 사이를 드러냈다. 신익희는 이러한 이승만의 태도에 실망을 했다. 대의를 거스르는 이승만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신익희는 자신의 뜻이 실현될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속으로 크게 실망했다. 그는 이 기회에 두 사람을 화해시켜 국가의 앞날에 큰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김구는 복잡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는 서울을 잠시 피하고자 지방순회 강연을 서둘렀다. 때를 같이하여 김구의 한독당 재정을 전담하던 신창균의 인천소재 조선성냥 공장이 경무부에 의해 군정에 접수되고 말았다. 신익희나 이승만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신익희는 그 길로 경교장의 김구를 찾아갔다. 김준연의 부탁으로 간 것이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고 현실정세에 대한 견해를 듣고 문안을 겸해서 찾아간 것이다. 경교장에 도착하고 나자 엄항섭으로부터 신창균의 조선성냥 공장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는 가뜩이나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의 사이를 더 벌려 놓으리라고 생각했다. 신익희는 곧장 이승만에게 발길을 돌렸다. 그는 김구의 지방순회 강연에 대해 먼저 말한 다음, 한독당의 재정부장이 경영하던 성냥공장이 돌연 경기도 상무국에 접수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독당이 그 회사에 나오는 재정으로 겨우겨우 버티어 나가던 일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이승만도 그 소식에 놀라 수밖에 없었다. 신익희는 그 문제로 한독당에서는 한민당이 군정을 업고 정적인 한독정당을 탄압한다고 비난하는 것과 한독당의 재정이 매우 곤란한 모양이라는 것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신익희의 설명을 들은 이승만은 몹시 불쾌했다. 탄압을 받는 한독당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걸핏하면 군정의 권력을 이용하려는 한민당의 태도가 못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이미 한민당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민당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는 했지만 그를 상징적인 존재로 앉혀 놓고 당이 실권을 쥐려고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경무부장 조병옥을 불러 놓고 추궁했다. 그러나 조병옥은 변명만을 늘어 놓았다. 김구에게는 이 때처럼 우울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김구는 효창공원 산책 중 한 청년으로부터 남북협상을 계속 주장하면 저격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은 경험도 있는 온갖 협박과 테러의 대상이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신익희가 찾아갔을 때에도 김구는 울적한 심사에서 아직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신익희는 조선성냥 공장 사건을 이승만에게 보고한 내용, 이승만이 조병옥을 불러 진상조사를 지시한 일에 대해서 김구에게 말했다. 그러나 신익희의 그 소식은 경무부가 극히 합법적으로 손을 댔다는 조병옥의 답변을 전했으므로 김구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 때 엄항섭으로부터 간밤 효창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다. 때마침 효창공원에서의 그 청년이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왔다. 그는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고 있었다. 김구를 살해하지 않은 데 대한 보복을 당한 것이었다. 청년은 방으로 들어오더니 김구와 신익희에게 공손히 큰절을 했다. 자기는 간밤의 일로 배신자의 낙인이 찍혀 오늘부터 애국단과 손을 끊었으며 33일 안에 그들이 김구를 제거할 계획이니 몸조심하도록 알리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예사롭게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신익희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느꼈다. 경교장을 나와 이승만을 방문한 신익희는 소위 조선애국단이란 불순분자들에 대해 이승만과 의논을 했다. 신익희는 우익테러를 경계해햐 한다고 이승만에게 제안했다. 신익희의 제안에 대해 이승만도 찬성이었다. 이승만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신익희의 주장대로 그 문제에 대해 재발이 없도록 당부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 결과 몇 개의 행동대를 편성하고 있던 조선애국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수도청 형사대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런 가운데 국회는 나라의 초석이 될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정부조직법도 수정, 통과시켰다. 앞으로 행정부와 사법부만 구성되면 명실공히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수립 전야는 너무나 혼란했다. 과거 1년 동안 군정 하에서 민정을 담당해 온 과도정부는 점차 그 기능이 위축되어, 과도정부 최고 정무관 서재필이 7월 10일 사의를 표명했다. 민정장관 안재홍은 이미 사임을 한 다음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서재필은 이구수 등 몇몇 국회의원들의 만류로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만 한국에 머물러 있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김구나 김규식은 그 일을 크게 환영하는 반면, 한민당이나 이승만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철수 문제는 워싱턴 당국이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정계의 관심은 국무총리에 쏠렸다. 특히 조소앙이 내정되었다는 설에 즉각 반기를 든 단체는 국민회와 한국민주당이었다. 국민회 소속 배은희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화장으로 달려가겠다는 청년 당원들을 만류하느라 갖은 애를 썼다. 신익희는 반발하는 국민회 청년들을 그런 식으로 잘 무마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의심스러운 바가 없지 않았다. 며칠 전에 자신이 조소앙을 이화장으로 안내했을 때, 이승만은 조소앙과 별실에서 얘기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전혀 몰랐었다. 비록 정당은 달라도 그는 조소앙과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둘 사이에 거리감을 느낀 것은 조소앙이 남북협상에 다녀온 다음부터였다.

  사회당 성명을 발표한 조소앙의 배후를 세부적으로 알 길이 없었다. 더구나 겉으로만 의논을 해 온 듯한 조소앙의 태도도 몹시 불쾌했다. 조소앙이 그 문제에 대하여 의논해 왔을 때 신익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대해 주지 않았던가. 신익희로서는 조소앙의 국무총리설을 믿을 수 없었다. 신익희는 두 사람의 사이가 도무지 석연치 않게 느껴졌다. 신익희는 그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조소앙의 집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낙원동 이시영의 집으로 가 보았으나 조소앙은 거기에도 없었다. 그 때 조소앙은 김규식의 초청으로 삼청장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는 신익희는 다시 발길을 돌려 경교장으로 향했다. 혹시 조소앙을 만날까 해서였다. 자기들이 수립토록 한 정부를 자기들이 승인하지 않는 데서야 순리가 아니지 않겠느냐는 신익희의 말에 김구는 다른 뜻을 비쳤다. 38선 이북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해도 승인해 주겠냐는 것이었다. 신익희는 즉시 부정했다. 신익희는 만일 이북에서 정부를 수립한다면 저희들끼리 만든 괴뢰 정부에 불과하다고 강력히 말했다.

  신익희와 김구의 정담이 무르익을 때 이시영이 찾아왔다. 오랜만의 경교장 방문이었다. 이시영은 신익희가 찾아왔다가 경교장으로 간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김구는 친히 계단까지 내려가 이시영을 부축하고 올라왔다. 서로의 인사말이 오고간 다음 이시영이 입을 열었다. 신익희는 선후배 정객 두 사람의 정담에 끼여들려 하지 않았다. 그런 조심성으로 해서 이시영과 김구에게 평소 신뢰를 받았다. 신익희는 그들 두 사람이 화제를 정치문제로 몰리자 자세히 들었다. 이시영은 김구가 이승만과 손을 잡도록 권했다. 신익희까지 있는 자리에서 결정을 볼 셈이었다.

  신익희는 화를 내거나 별로 반대하는 기색도 아닌 김구의 기분을 관찰해 보았다. 그 결과 김구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선배와 정치문제로 다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구는 전날처럼 다투지 않고 선배인 이시영에게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만 대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익희 주변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조소앙과 조병옥이 불화였다. 과거 조소앙은 조병옥을 미군정의 권력을 등에 업고 기고만장해서 군정의 연장을 꾀한다고 판단했고, 조병옥은 남북협상 문제를 놓고 조소앙을 신랄하게 비판했었다.

  그 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 요즘 경찰의 우익단체 수사를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다.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익 청년들을 스스로 잡아들이는 경찰의 뜻을 모르는 조소앙은 이를 따지기 위해 조병옥을 찾아갔다. 그러나 말도 못 붙이고 경무부를 쫓겨 나온 조소앙은 권력에 의지하기로 결심하고 이승만을 찾아갔다. 정부수립에 협조하겠다고 태도를 바꾼 것이다. 이승만은 무슨 속셈인지 조소앙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조병옥과 가까운 신익희를 보자 비난을 중지했다. 신익희는 국민회에서 조소앙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국민회 지방대의원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그 곳에 가 있었다. 남북협상에 참가한 자는 정부 구성요원이 될 수 없다는 한국민주당의 국회 건의에 대해 격분한 조소앙이 찾아온 것이다.

  조소앙은 한민당에서 정부요인 자격기준을 건의해서, 남북협상에 다녀온 사람은 무조건 정부수립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해서  신익희는 그들을 돌려보내는데 겨우 성공했다. 하지만 이화장에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이 곧 조병옥은 즉시 이화장으로 달려왔다고, 이승만의 무마작전으로 조병옥은 국민회의 건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승만이 자신의 공로를 극구 찬양해 준 다음 정부수립에 중책을 주겠다고 했으나 조병옥은 국민회의 건의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런 내용을 전혀 모르는 신익희에게 조병옥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신익희는 즉시 만났다. 전부터 국민회가 한국민주당을 들어 비난했고, 국정에 참여하는 자신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그들이 왜 자신이나 한국민주당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이었다.

  사상적인 문제에 대해 그는 이승만 이상으로 반공정신이 확고했다. 그는 이미 대한반공연맹을 조직하여 반공사상을 고취, 계몽에 노력해 왔다. 멸공에 총궐기, 멸공에 총단결, 멸공에 총집중을 호소하여 붉은 무리의 오열 박멸에 크나큰 역할을 했었다. 또 한가지 그가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국민회 동지들의 강요로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의 민선 대의원으로 종로구 보궐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해 1월 20일 제12차 본회의에서 그가 행한������신탁통치 반대에 대한 발언������은 국내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당시 의장 김규식이 사임한 이후 그 후임으로 의장에 피선되었었다. 그 후 1948년의 총선거에서 고향의 모든 사람들이 과거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하고 무투표로 당선시켜 준 후 제헌국회에서 부의장에 당선된 것이다. 신익희가 겨우 진정시켜 돌려보낸 조병옥(趙炳玉, 1894-1960)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한성일보가������민주분열을 조장하는 무고를 규탄한다!������라는 제목하에 조병옥을 신랄하게 물고 늘어진 것이다. 조병옥은 독립운동가로써 또는 정치가로써 명성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192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해 귀국하여 기독교 천년회 이사와 신간회총무를 지냈다. 1929년에는 광주 학생 등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 동안 옥살이한 경험도 있는 사람이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송진우 등과 한국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1948년 정부 수립 뒤 대통령 특사, 유엔 한국대표 등을 지냈으며 6․25 사변 때 내무부 장관으로서 대구 방위 전선에서 진두지휘 하였다.

  그런 조병옥이 분함을 참지 못해 씩씩거릴 때, 신익희는 이승만의 부름으로 이화장에 갔다. 그에게 한성일보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묻기 위해서였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원래 다변한 인물인 이승만이다. 거기에 비해 신익희는 술수 같은 것은 좀처럼 부릴 줄 모르는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신익희는 비로소 이승만이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익희는 그 일로 이번에도 이승만의 정치개척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한편, 조병옥은 그 나름대로 자기 방어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 다른 곳에서 엉뚱한 문제가 터졌다. 김지웅이란 자가 나서서 김준연과 결탁하여 되어 김구와 김규식 등 소위 남북협상파들이 공산당과 내통한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경교장에서 그 문제로 풍랑이 일어나고 있을 때, 김준연은 이화장에서 이승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심 김구가 공산당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도 이승만은 김준열을 극구 칭찬해 주었다. 그러는 한편, 김준연 역시 공산당이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는 이승만의 속셈은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신익희가 이화장에 갔을 때 김준연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변명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신익희는 눈을 크게 떴다. 이승만은 분명히 김준연의 성명을 극구 찬성하는 듯했다. 이승만이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김구나 김규식은 이미 방패를 잃은 무력자라는 게 신익희의 견해였다. 그런 견해는 한국독립당 당무회의에서의 격론이 입증하였다. 당무회의에서는 김준연의 성명에 대해 신랄한 반박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김구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닐뿐더러, 국민은 그 사실을 인정해 주리라는 것이다. 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방침을 밀고 나갔다. 김구가 남북협상에 관한 제의를 해서 유엔 한국위원단의 초청을 받았다는 소식에 이승만은 불쾌하다 못해 노기까지 띠었다.

  부름을 받고 신익희가 갔을 때 이승만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해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신익희는 이승만에게서 김구와 유엔 한국위원단과의 화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은밀히 알아보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이승만은 김구의 주장이 유엔에 전달되면 우선 남한의 우익정당이 단결을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터이므로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신익희도 내심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 문제로 세상이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국회에서 다루어 소란을 막자는게 그의 의견이었다. 이승만이 비록 김구를 미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익희로서는 그들 사이가 최소한 더 멀어지지 않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들 두 사람의 격심한 불화는 나라의 정부수립에 그만큼 악영향을 준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국회에서 그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을 때 김지웅이라는 사람이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왔다. 한국인으로 중국군에서 육군 소장을 했다는 김지웅은 정국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어느 쪽이든 붙어서 권세를 잡아 보려는 속셈을 지닌 자였다.

  김구를 속이려다 불호령을 맞은 김지웅은 도망치듯 경교장을 나왔으나 단념하지 않았다. 다음엔 이화장으로 찾아갔다. 기회만 있으면 수중의 사람을 확보하려는 이승만은 김지웅의 모든 말을 그대로 믿는 듯했다. 신익희가 갔을 때 이승만으로부터 자신을 도와 달라는 언질을 받은 김지웅은 자못 감격해하고 있었다. 신익희는 뜻밖의 손님을 보고 약간 주춤했으나 정작 놀라고 당황하는 것은 김지웅이었다. 김지웅은 신익희를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의 큰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안색이 변했다.

  신익희는 놀랐다. 이승만이 만일 김구나 신익희처럼 중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익희는 어쩔 줄 모르는 김지웅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중국군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신익희였다. 도망치다시피 허리를 굽실거리면 나가는 김지웅에게 자주 찾아오라는 말까지 하는 이승만을 보고 신익희의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신익희의 설명에 의해 김지웅은 그 후 이화장과 경교장의 출입을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 일이 불씨가 되어 뒷날 큰 위험을 겪게 될 줄은 신익희도 전혀 몰랐다. 김지웅은 신익희에 대해 이 때 악감정을 품었던 것이다. 어쨌든 김지웅은 화살을 김구에게 겨누고 조병옥 등을 찾아다니며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김지웅과 같이 교활한 인물에 대해서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던 신익희였지만 그는 어느 정파간에서도 비판을 받지 않았다.

  특히 그는 포섭력이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신익희 자신이 한독당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그에게 국회 안에서 김구를 따르는 소장파 의원들이 설득을 맡겼다. 조병옥의 권고에 따라 이승만이 내린 결정이었다. 조병옥이 신익희에게 그토록 무거운 짐을 떠맡기도록 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른바 소장파들을 견제하려면 한민당이 정면에서 나서는 것보다, 신익희를 앞세우는 편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평소의 성격 그대로 이승만의 종용을 받은 신익희는 곧 소장파의 핵심 멤버를 초빙해서 간담회를 열었다. 의외로 소장파 의원들은 강경했다.

 평화적인 수단으로 조국이 통일만 되면, 그 후 이 나라가 공산주의가 되더라도 하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장파 의원들 가운데는 벌써부터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 활동하는 남로당원이 있었다. 그들은 사사건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시를 받고 있었다.

  신익희는 그들이 주장이 김구의 통일방안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앞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사회의 분노와 김구의 정치노선이 빚을 사태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고심은 현실로 나타났다. 원래 한민당 소속이던 김약수 의원이 1947년 5월 30일, 조선공화당을 결성하고 자신이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닌 중간에서 쌍방이 눈치를 살피던 중, 돌연 김구의 통일방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극단적인 우익세력과 맞서는 원내의 적잖은 소장파를 이 기회에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그는 김약수의 의도가 의외로 확고한데 대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조선공화당이라는 것을 만들어 대중권익 보호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신익희는 이승만에게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승만은 결국 김약수를 위시한 소장과 의원들을 국회에서 축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김약수와 노일환은 곧 국민회와 한민당의 반대세력을 규합해서 신당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적어도 대통령 선출 전에 신당 규합을 이루어 원내 세력을 과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민당의 강력한 조직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국민회의 포진으로 이들의 꿈은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익희는 그와 같은 사실을 전해 듣자 원내 동향이 걱정되었다. 그는 곧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한 다음 일련의 협의를  가졌다. 신익희는 국회 내의 동향으로 보아 김약수와 소장의원들이 신당을 조직하여 국회 내에서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이승만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빛을 띠었다.

  적어도 이 나라를 영도하는데 있어서 자기 이상의 인물이 없다고 자부하는 이승만이었다. 그런 자신에 대한 소장의원들의 도전적 태도는 하나의 정신 이상적 망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모든 동포가 오직 자기를 따름으로써 조국의 장래도 기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승만인 것이다.

  이화장을 물러 나온 신익희는 곧 발길을 조소앙의 집으로 돌렸다. 비록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정부수립을 지지하고 있으나, 문제의 소장의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로 생각하는 인물은 조소앙이었다. 신익희는 소장파 의원들의 배후인물이 조소앙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신익희 자신의 판단이었다.

  김구의 협상 통일론을 지지하고 나선 노일환, 김약수 등은������선 통일 후 정부수립������론에  동조하고, 단정수립을 반대하면서도 남한만의 정부수립을 고집하는 한민당의 움직임에 대해서 신익희로서는 어떤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위기는 매우 미묘하게 진전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신익희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조소앙에게 소장 의원들의 무마를 당부한 신익희는 소장 의원들의 동태가 계속 심상치 않다는 소식에 곧 윤석구를 만났다. 신익희와 윤석구는 한때 한독당을 창당한 동지였으며 과거 중국 망명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신익희가 갔을 때 윤석구는 그가 왜 왔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급진파에 휘말려 사리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윤석구는 무소속 소장 의원들이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뚜렷한 목적과 이유를 자기 나름대로 주장했다. 그들이 당초 국회에 들어올 때는 이승만을 받들어 나라를 이룩할 뜻에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민당만이 독주하고 있어 다른 정당은 고개도 못 드는 판국이니,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정작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해외에서 투쟁한 사람들은 지금 발붙일 곳이 없으며, 무소속 소장 의원들은 바로 그런 점을 두고 한민당과 투쟁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세간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반 이승만 세력의 규합이라지만, 본 목적은 이승만을 반대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윤석구의 그런 열띤 주장은 신익희가 생각하는 급진파들의 주장과는 좀 달랐다. 신익희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은 한민당에 대한 투쟁에 관해서가 아니라 소장 의원들의 평화통일과 양군철수 주장에 관해서였다.  신익희가 자신의 그런 우려를 말하자 윤석구는 오히려 그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던 것이다. 윤석구는 신익희의 큰코다치는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 그러나, 윤석구는 급진파로서 무소속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노일환이나 이문원 등과 적극적으로 뜻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신익희가 그 문제에 대해 사방으로 뛰고 있을 때 다른 곳에서는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구를 공산당이라고 맨 처음 주장하던 김지웅이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한독당에서 이승만 암살을 모의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조병옥을 찾아가 그런 주장을 했고, 다시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마침 이화장에 있던 장택상이 김지웅을 대신 만났다. 김지웅은 그 자리에서 미군 수사기관에 있으며 조병옥의 자문위원이라는 엉터리 직함까지 내세우다 장택상으로부터 이화장을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김지웅이 던진 이승만 암살 건은 장택상이나 조병옥을 긴장시켰다. 당사자인 이승만도 몹시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1년 전 이화장을 찾아와 중국 육군의 소장이었다고 떠벌리다 신익희 때문에 꽁무니를 뺐던 김지웅이었다. 이승만은 그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관심한 이승만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확대시켰다. 이승만은 윤 비서를 통해 국회로 연락하여 신익희를 부르도록 했다. 김구 일파가 자기를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에 의심을 굳히고 신익희와 그 대책을 협의하려는 것이다. 이 무렵, 신익희는 몸이 불편하여 국회에 등원치 않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신익희가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을 들은 김약수가 문병차 왔는데 그는 사실상 매우 중대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그는 김구 일파의 이승만 살해 음모설이 당치도 않은 모략이라고 말했다. 신익희는 그 엄청난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한민당이 아무리 김구를 미워해도 그런 근거 없는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신익희는 김구의 결백을 믿었다. 김약수는 더욱 열을 올려 자기의 주장을 역설했다.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진영에서는 그런 모략과 함께 송진우 사건이나 장덕수 사건까지 그 배후가 김구하고 몰아 세웠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나올수록 소장파에서는 더욱 그들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겠다는 주장이었다.

  신익희는 김약수가 돌아가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즉시 이화장으로 갔다. 이승만은 그가 자기의 부름을 받고 온 것을 생각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설명부터 들었다. 자기를 해치려는 자들이 있다기에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차츰 그 동태를 살펴보니 전혀 낭설이 아닌 것 같고, 그 무리가 바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신익희는 김구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자신이 백범을 얼마나 잘 알고 있으며 그는 절대로 이승만을 해칠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런 모함을 믿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신익희가 아무리 주장해도 이승만은 냉담할 뿐이었다. 신익희는 하는 수 없이 그냥 이화장을 물러 나왔으나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앞으로 자기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곧 김구의 말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승만의 말이 그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는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한민당을 찾아갔다. 마침 김준연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익희는 이화장에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김준연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이제야 알았느냐는 투였다. 김준연으로부터 경찰이 이미 수사에 착수했다는 말을 들은 신익희는 깜짝 놀랐다. 한편, 문제의 발설자 김지웅은 조병옥에게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확증은 고사하고 정보수집까지 어렵게 되자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전부터 안면이 있는 미군 CIC의 텐스 소령을 찾아갔다. 다른 각도에서 미군 세력을 움직여 목적을 달성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김지웅의 그와 같은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혼자서 공을 세우려고 날뛰던 텐스 소령은 우선 경무부장 조병옥으로부터 다음은 수도청장 장택상에게서까지 협조를 거절당했다. 다음으로는 사령관 하지를 찾아갔으나 거기서도 결국 거절당했다. 한국인에 관한 일은 한국인이 해결하도록 놓아두라는 하지의 말이었다. 다만 한가지, 사령관 하지는 김지웅이 주장한 경교장 수색을 조병옥에게 명령했다. 조병옥은 장택상과 그 문제를 의논했으나 장택상은 반대의견을 고집했다. 김구가 있는 경교장을 수색한다는 자체를 피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발설자인 김지웅을 의심하고 그를 추궁해서 사실 여부를 밝히기로 하였다.

  조병옥이 수도청에서 그 문제를 합의하고 있을 때, 신익희는 경찰정보의 출처를 알아보기 위해 경무부를 방문하고 있었다. 신익희는 조병옥이 올 때를 기다리는 동안 그 곳에 있는 동앙일보를 흩어 내려갔다. 2면을 들치자 김준연이 쓴 고하 송진우 추모기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를 찬찬히 읽어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송진우를 죽인게 좌익이 아니고 우익이며 그들은 이번에 또 이승만을 해치려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신익희는 기가 막히고 탄식이 절로 나와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조병옥이 들어왔다.

  신익희나 조병옥으로 하여금 정보의 진위를 문제삼지 말고, 김구가 언제 어느 때 그런 행동을 하는가 주시해야 된다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두 사람의 설명에는 전혀 아랑곳 않고 김구가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만 주장했다.

  신익희는 그런 이승만의 고집을 놓고 생각해 보았다. 이승만은 김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또 믿었다. 김구가 자기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엉뚱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일까? 마음과 다른 주장을 고집하는 이승만에 대해 신익희는 나름대로 분석을 했다. 즉, 이승만은 김구가 단순히 독립운동가일 뿐이지 정치인으로서는 자질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김구라는 존재는 나라와 동포의 장래를 위해 매장되어 주어야만 했다. 정치인은 될 수 없는 혁명가로서 그것도 과격한 방법이나 쓸 줄 아는 김구가 엉뚱한 주장이나 하도록 더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 이승만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굳은 얼굴에서 이번 기회에 김구를 매장시키려는 결의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놓고 신중히 생각했지만, 그로서는 달리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었다. 이승만이 그런 결심을 하고 있는 이상 신익희는 물론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다. 신익희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어서 곰곰이 궁리한 끝에 영등포에 있는 기독교 장로 이종수를 찾아갔다. 이종수는 김구와 동향일 뿐 아니라 과거 망명시절부터 김구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이승만을 직접 상대해서 김구의 무고함을 증명하려다 실패한 신익희는 김구를 설득하기엔 이종수가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신익희는 지금 김구가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나려면 남북협상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김구의 정치적인 생명이 끝날 것은 물론,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고 말했다. 신익희는 그런 사실을 누누이 이종수에게 강조한 다음, 김구의 구제가 시급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는 어떤 경우에라도 이승만이 김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신익희와 약속을 한 이종수는 실제로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포기하도록 만들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김구의 정치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라도 나서야 했다. 그는 결국 김구를 붙들고 눈물로 호소 할 결심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김구를 만난 이종수는 눈물로 하소연했으나 김구는 듣지 않았다. 결국 신익희와 상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종수의 고백을 들은 김구는 한 마디로 일념통일과 응접불가(應接不可)라는 단호한 말로 거절했다.

  신익희는 이종수를 경교장으로 보낸 다음 날 경무부로 조병옥을 방문했다. 그는 이번 사건 의 발설지를 처벌하고 김구에 대한 모략을 국민 앞에서 드러내어 이승만과 국민의 오해를 풀어 볼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에 김구를 이승만이 지나치게 의심하기 때문에 판단을 그르칠 염려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큰 불행이었다.

  신익희는 조병옥을 만나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조병옥은 난색을 표했다. 발설자를 처벌할 수는 있지만, 아직 모르는 국민들에게 공개하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조병옥의 뜻이었다. 조병옥은 또한 신익희의 우려가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신익희가 김구나 한독당을 옹호해야 될 입장이라고 해도 조병옥은 한민당 편에 서 있는 경무부장이다. 그는 솔직히 김구가 어떻게 되는, 한독당이 어떻게 되든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입장이었다. 조병옥은 신익희의 말대로 김지웅에 대한 엄한 처벌을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조병옥은 김지웅이 또 다른 계략을 이미 세워놓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텐스 소령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가 신익희에게 알린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원래 그 사건을 발설한 것은 최기남으로서 그는 한독당 평당원으로 있다가 탈당하여 김지웅의 심복으로 있는 자였다. 최기남은 김구의 이승만 암살설 외에도 또 다른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군 CIC가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히 조병옥으로서는 발설자가 따로 있으므로 김지웅을 허위 발설자로 처벌할 수 가 없게 되었다. 조병옥으로부터 그런 보고를 받은 신익희는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배후를 캐내어 어떤 자가 그런 모략을 했는지 조속한 시일 내에 단락을 짓는 게 난국을  수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는 조병옥이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신익희가 아무리 강경하게 주장해도 그는 이번일을 그냥 덮어 둘 심산이었던 것이다. 신익희는 조병옥의 그런 속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급한 것이 김구의 설득이었으나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그만 낙담하고 말았다.

  김구에 대해 어떤 노력도 더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그는 괴로웠다. 그것은 김구와 앞으로는 뜻을 달리해야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앞에서 계속 김구나 한독당을 옹호하는 것이 자신의 입장까지 궁지로 몰아 넣을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이승만으로부터 더 이상 오해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김구나 한독당에 대한 애착을 단념키로 하고 이승만을 찾아갔다.

   김구라는 사람에 대한 과거가 어떻든 지금은 모든 동포들이 필요로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 이승만은 신익희가 자신을 도와 이 나라의 정치인이 될 생각이라면 김구와의 인연을 끊으라고 강조했다. 그 때 뜻밖에도 조봉암이 찾아와 이승만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조봉암은 이승만이 불렀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이 조봉암의 의사를 새삼스럽게 타진했다. 조봉암은 자신이 한국민주당이나 국민회의 주장에 반대한 이유를 밝혔고, 이승만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원내에서 분과위원장을 선출할 때 한민당이나 국민회 의원들이 다른 의원들의 발언조차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출한 이야기를 이승만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조봉암이 이승만과 굳은 악수를 교환하며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김구와 한독당에 대한 애착심을 끊기로 결시한 신익희는 이승만에게 있어서 전보다 더 필요한 존재였다. 조봉암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앞으로 국회는 별 말썽이 없이 소신대로 운영할 수 있다고 믿은 이승만은 소장파 의원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놓고 신익희와 상의했다.

   경무부의 조병옥과 수도청의 장택상은 사령관 하지의 강력한 추궁으로 경교장으로 수색하게 되었다. 물론 형식적인 수색이었다. 사복차림의 형사 몇 사람을 보내 김구의 양해를 얻은 다음 그 곳에 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미군 CIC가 입수한 정보는 허위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정보가 미군 정보기관에 입수되었으며 적어도 군정이 폐지되기 전에 한독당에 대한 결정적 탄압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미군 수사기관의 그런 복안을 뒤늦게 눈치챈 조병옥은 서둘러 신익희를 찾아왔다. 그렇게 하고 헤어지 신익희는 얼마 후에 다시 조병옥의 방문을 받았다. 조병옥은 이승만으로부터 한민당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대통령 선출을 앞두고 신당운동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신익희의 말에도 불구하고 조병옥은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다. 그러나 신익희가 염려하는 것은 신당운동이 대통령 선출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조병옥의 그런 주장에 대해 그가 신당운동을 와해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승만이었다. 신익희는 신당운동의 주동인물로 알려진 김약수를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국회 부의장실에서 만났을 때 김약수가 먼저 앞질러 말했다.

  김약수 역시 신익희의 동조에 기분이 좋아져서 물러갔다. 모처럼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가 싶었던 신익희의 기대는 이승만과 그를 따르는 배은희 등 국민회 간부들에 의해 완강한 반대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신익희로부터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진 이시영이 이승만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이승만이 강경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 날, 이승만이 신익희와 배은희 등 국민회 간부들을 이화장으로 불러들여 문제의 발언을 했다. 그의 말은 어떤 경우가 있어도 김구를 정부수립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결의를 노골적으로 암시했다. 이승만의 말에 선뜻 배은희가 나서서 잘라 말했다. 국민회 소속 의원 가운데 그런 주장을 하는 자가 있다면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로써 신익희는 자신의 계획이 벽두부터 난관에 부딪친 것을 알았다.

 신익희는 김약수와 나눈 대화에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는 먼저 국민회의 공식결정을 내리자고 주장했다. 그가 알기에 국민회 안에서도 아직 김구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배은희의 태도는 김구 부통령설을 주장하는 자들과는 이 시간부터 국민회에 같이 일할 수 없다는 몹시 강경한 태도였다. 신익희는 자신의 생각이 어느 틈에 무너져 나가고 있는 소리를 귀로 듣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아직 그 뜻을 완전히 단념할 생각은 없는 신익희였다.

 한편, 김약수는 자신의 뜻을 피력하기 위해 김구를 찾아갔으나 김구의 주장은 오직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그 나름대로 몹시 불쾌했다. 김구가 부통령이 되든 안되는, 국민회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몹시 불쾌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이 문제를 결혼 풍습에 비유하며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좋든 나쁘든 강제결혼이 가능하지만, 철이 든 다음에는 강제결혼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김구가 이승만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아닐뿐더러, 그가 자신을 몹시 싫어하는데, 만일 어울린다면 정국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그 경우를 가정의 파탄과 비유해서 신익희에게 설명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이야기에 대해 귀를 기울였다.

 지금껏 누구보다도 김구의 부통령 추대에 미련을 가졌던 신익희로서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누구한테도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김구에 대해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조병옥이 김준연으로부터 김구가 공산당과 내통한다는 정보를 들은 것이다. 조병옥은 즉시 그 사실을 신익희에게 알렸다. 소식을 들은 신익희는 너무 놀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정보가 김지웅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조병옥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김지웅이란 인물이 무엇 때문에 끝까지 김구를 물고 늘어지려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신익희는 국회에 등원하는 즉시 김준연을 만나 김구의 공산당 내통설을 은밀히 물었다.

 김구가 또 다시 당할 시련은 자명한 일이지만, 지금의 신익희로서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대책도 강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우선 이승만이 그 사실을 알면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만의 그런 오해가 두렵고, 자신의 정치생명에 영향이 미칠 것을 염려해서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드러내지 않고 누구와도 등을 돌리지 않은 상태로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신익희는 이승만으로부터 이시영을 만나라는 새로운 지시를 받고 그를 찾아갔으나 이시영은 집에 없었다. 이시영이 의정부근처의 다락원에 있다는 가정부의 말을 듣고 신익희는 그 길로 다락원으로 갔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표정을 살폈다. 이승만이 자신 앞에서 몹시 착잡해지는 마음을 애써 숨기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익희도 이승만의 다른 속셈은 전해 짐작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신익희에게 알리지 않고 윤 비서에게 이시영을 데려오도록 했던 것이다. 다른 보고차 이화장에 들어갔던 신익희는 때마침 윤 비서와 이시영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이승만은 마치 이시영이 제발로 다시 돌아온 것처럼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이시영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신익희로서는 이시영이 분명히 은퇴의 뜻을 밝힌 지금, 다시 이승만을 찾아온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국민회를 정당으로 개편해 보려는 거동이 몇몇 간부들에 의해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한민당에 의해서 이에 대한 정보가 재빨리 탐지되었으며 이 정보에 접한 한민당 내부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같이 소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한민당은 원내 유일의 공당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오직 이승만을 업고 정부수립에 박차를 가래 온 정당이었던 것이다. 만일 국민회가 정으로 개편된다면 그것은 이승만이 영도하는 정당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 정당이 여당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이승만을 업고 정부수립에 매진해 온 한민당은 하루아침에 지붕을 잃고 하늘을 쳐다보는 신세가 될 것이 너무 명백하다. 그 문제를 놓고 한민당 간부들은 장시간 갑론을박하던 끝에 우선 이 정보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기로 했다.

 허정, 조현영, 서정희 등 대표들이 신익희를 만나 보기로 한 것이다. 신익희는 그들 한민당 대표들로부터 사실을 전해 듣자 시원히 대답해 줄말이 없었다. 정작 기가 막히고 답답한 것은 신익희였다. 그도 그 이상은 이승만으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이승만이 조병옥과 장택상에게 비서를 보내, 정부통령 적임자와 내각은 어떤 사람들이 적당한가 여론조사를 해서 보고하도록 한 사실도 신익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가 과거 5백년의 전제정치와 또 36년간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군국주의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보다 민주주의가 생소하다는 것이 이승만의 설명이었다. 지금 우리 나라 국민들은 민주주의 정치가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며, 뿐만 아니라 일부 지도자와 일부 국민들은 장차 이룩하려는 민주주의를 개인의 방종으로만 안다고도 역설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말에 대해 전적으로 찬동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타당한 말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신익희의 그런 반응을 안중에 두지 않는 듯이 계속해서 또렷또렷 말했다. 국민들의 수준이 정당정치를 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이승만이 신익희에게 따지려는 핵심은 그러한 상황에서 왜 국민회를 정당으로 개편하려는 것이냐는 설명이었다. 국민회의 정당 개편설이 신익희에 의해 나온 것으로만 알았고, 국민회 안에 파벌을 조성하고 국민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도 바로 신익희라고 의심했던 이승만이다. 그가 배은희의 태도에 대해 몹시 흥분하고 있는 것을 본 신익희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화장을 나온 신익희는 곧 낙원동에 있는 이시영을 찾아갔다. 이승만과 그가 어떤 타협을 보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신익희는 내심 이시영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시영은 앞으로 이승만이 자기의 말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앞으로 수립될 정부에 보다 광범위한 인재등용을 구상하고 있으며 부통령에는 김구를 밀겠다고 말했다. 신익희는 이시영이 다락원에 가 있을 동안의 일들을 설명했다. 국민회나 한민당은 물론, 국회 안에서도 백범 불가론이 크게 대두되고 있으며 앞으로 수립될 정부나 김구 자신을 위해서도 그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시영과 함께 이화장으로 갔던 신익희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승만이 이시영과 약속한 것은 우선 이시영이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했던 말임을 이내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가시 돋친 말을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시영이 약속을 전재한 다음 조소앙을 국무총리로 추천했을 때 이승만은 시큰둥하게 받아넘겼다. 신익희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이승만이 성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며, 조소앙의 국무총리 문제도 재거론이 여지가 없음을 판단했다. 이승만은 이상하게도 국무총리 적임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정부통령 선출을 며칠 앞두고 각 정파에서 국무총리 각축전이 벌어졌어도 그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국민회에서도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 다시 정당 개편설이 본격화되었다. 국민회 지방 대의원 대회에 대해 일련의 토의를 하고 있었다. 신익희는 이번 대회가 잘못되면 한민당과 마찰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이승만은 신익희의 얘기를 듣지도 않고 윤 비서에게 대표 한 사람을 들어오게 하도록 지시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켜보았다. 대표 한 사람이 들어와 국민회의 정당개편 주장과 이승만의 당수직 허락, 국무총리의 국민회 추천 등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간단하게 그 대표를 되돌려 보냈다. 대답은 내일 있을 대의원 대회에서 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튿날, 그러니까 7월 7일과 9일 양일간에 걸친 부민관에서의 대한독립 국민촉성회 제7차 전국 대표자 대회에서 이승만은 그 일을 분명히 못 박았다. 국민회는 정당으로 개편될 수 없으며 전세계가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7월에 완료할 것이고, 늦어도 8월 15일까지는 정부수립을 선포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그와 같은 이승만의 중대발언은 정계와 국민들에게는 물론, 연합국과 군정 당국을 몹시 놀라게 만들었다.

 아무리 정부수립이 시급하다 해도 국회가 성립된 지 불과 한 달만에 정부수립을 완료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국회는 정부수립에 대한 만발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다만, 내각의 인선문제만을 남겨 놓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승만의 단호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정부개편을 시도했던 국민회의 지도자와 지방 대의원들은 그 마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회가 끝난 다음이었다. 신익희는 집단적으로 몰려와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그들의 태도에 몹시 불쾌했고, 안 되는 것을 구태여 해보려고 덤비는 그들의 태도에 마침내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승만은 대의원들을 무식하다고 경멸하면서 그런 자들이 대의원으로 있는 이상 앞으로 국민회를 지도 육성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걱정했다. 또한 지금 국회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이승만은 개탄했다. 정당이 무엇이고 정당정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정당정치가 시기상조라는 얘기였다.

 그때 조병옥이 찾아와 매우 중대한 용건이 있다면 이승만과 별실회담을 요청했다. 조병옥은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군정을 아주 폐지하지 않고 계속 정부를 도와 그 기능이 완전히 발휘될 때까지 잠재 존속시키겠다는 사령관 하지의 뜻을 가지고 왔다. 이승만이 들을 턱이 없었다. 그는 정부수립과 동시에 군정의 완전 폐지를 거듭 강력히 주장해서 조병옥을 돌려보냈다.

 신익희는 하지보다 조병옥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는 외국사람이니 그렇다 치고, 누구보다도 정부수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잘 아는 조병옥이 그런 제의를 했다는 것은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매우 괘씸하게 느껴지는 신익희였다.

 전부터 군정 참여자에 대해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는 있었으나, 아직 한번도 내색하지 않던 이승만이다. 그는 조병옥이 하지의 그런 전달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무척 괘씸하게 생각한 나머지 신익희 앞에서 처음 그런 말을 비치게 되었던 것이다. 신익희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이승만과 동감이었다. 과거의 모든 것을 용서해 준다고 해도 지금의 그런 태도는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병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하지는 또 한번 이승만이 자기에게 도전적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내세워 이승만을 공격할 입장도 아닌 하지는 생각을 바꾸어 이승만을 직접 만나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장래를 설명해 주겠다는 것이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난색을 표했으며 그는 그 사람에게 국회 본회의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어느 국회에서나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가끔 의제와는 엉뚱한 문제를 들고 나와 싸움을 벌이는 꼴을 외국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신익희가 이승만으로부터 한국위원단에 초청장을 내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을 때, 윤 비서가 들어와 조병옥의 방문을 알렸다. 이승만은 매우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방문한 이유를 들었다. 조병옥이 다시 별실면담을 요청했다는 말에 이승만은 불쾌한 빛을 보이며 거절했다. 더욱 난처해진 것은 조병옥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뜻대로 있다. 이튿날의 국회 본회의에서 유엔 한국위원단을 초청해 놓고 하지를 통렬하게 비난한 것이다. 하지라는 이름은 한마디도 떠올리지 않았지만 그 내용을 보고 받은 하지는 즉시 알아차리고 또 한번 이승만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돌아가는 모든 정세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물론이고 워싱턴 당국까지 이승만의 8․15 정부수립 선포주장을 환영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자신이 점령군 사령관이라고 해도, 하지는 군정연장 운운할 입장이 못 되는 것이다. 하지는 할 수 없이 한국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군정을 폐지는 하되, 정권이양을 지연시켜 계속 자기의 영향력을 과시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는 그와 같은 군정폐지 결정에도 불구하고 정계에는 군정연장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신익희는 그 소문을 듣자 이승만을 찾아가 염려의 빛을 나타냈으나 어찌된 일인지 이승만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조병옥의 입에서 워싱턴 당국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는 이승만은 타이프라이터가 있는 별실로 갔다. 미국에 있는 임영신을 통해 미국무성에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조병옥의 말대로 하지나 워싱턴 당국이 정권이양을 지연시키려 한다면 도저히 좌시할 수 없다고 느낀 그는 분노에 찬 표정이었다. 결국 조병옥은 이승만과 하지의 중간에 끼어 완전히 궁지에 빠지고 말았으며 신익희도 그런 조병옥을 동정해 주지 않았다.

 조병옥은 군정의 정권이양에 대해 하지와 의미는 다를지 모르나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으로부터 하지가 만나고 싶으면 이화장으로 오라는 강경한 말을 들은 조병옥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도저히 하지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익희가 다시 조병옥의 방문을 받은 것은 이승만의 말을 그대로 하지에게 전할 수 없어서 지원을 요청하러 찾아왔을 때였다. 조병옥은 이승만의 태도가 하지를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것이며, 그럴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설명이었다.

  신익희는 하지에 대해 이승만이 그러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승만이 환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기 전의 일이었다. 이승만이 하지와의 면담을 요청했을 때 하지는 오만을 부리며 만나고 싶거든 자기 관저로 오라고 했었다. 이승만은 할 수 없이 관저로 찾아가면서 그래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프란체스카를 동반했었다. 그러나 하지는 프란체스카를 밖에 세워 둔 자동차에서 떨며 기다리게 하고, 회담도 일부러 세시간이나 끄는 오만불손을 부렸던 일이 있었다.

 신익희는 그만 어이가 없었다. 조병옥의 말이 사실이라면 새로 수립되는 정부는 그 출발부터 국민의 기대에 어긋나는 무력한 정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익희는 그 사실을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다. 그는 조병옥과 헤어진 즉시 이승만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가 전하는 말에도 불구하고 전혀 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미국에 있는 임영신으로부터 이승만에게 소식이 왔던 것이다. 미군 육군장관과 민정장관이 임영신과 만난 자리에서 워싱턴 당국의 태도를 밝혔다. 대한민국 정부가 8월 15일 수립된다면 남한의 미군정은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면 철폐할 것이며, 정권이양에 대한 기술적인 기간은 늦어도 3개월 안에 완료한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알게 된 다음에야 신익희는 이승만의 확신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과 하지의 다툼은 이제 하지의 패배로 끝날 조짐이었으나,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든 이승만이 콧대를 꺾어 놓고 귀국하려는 심산 같았다. 드디어 하지는 매우 교활한 방법을 떠올렸다. 앞으로 군정이 오래 계속되지 못할 터이니 자기들 손으로 한국인의 교육과 건설을 담당할 수는 없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을 잘 아는 딘 소장은 당장 난색을 표했다. 하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딘 소장에게 그 정책을 보다 정확하고 실현성 있게 수립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는 어떻게 하든 애일 강경론자인 이승만의 기를 꺾어 놓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그 어리석고도 유치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하지의 그런 교활한 발상은 미처 정책이 수립되기도 전에 정보가 새나오고 말았다. 그 소식에 접한 국회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해졌다.

 전라북도 완주 출신의 이석주 의원에 의해 제19차 본회의에 그 문제가 공개되었으며, 급기야 교섭위원을 통해 그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소재까지 밝혀야 한다는 제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게 되었다. 본회의에서 사회를 맡고 있던 신익희는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사회봉을 김동원에게 맡기고 이내 이화장의 이승만에게 알렸으나,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승만을 자신에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임영신을 통해 하지의 실책을 모두 워싱턴 당국에 알렸고, 이번의 어리석고 교활한 정책도 이미 알려져 육군차관 드레이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터였다. 이승만은 머지 않아 하지와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의 그런 확신은 곧 현실로 나타나,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세우려던 하지에게 워싱턴으로 훈령이 내려진 것이다. 한국의 정부수립이라는 골인 점을 코앞에 두고 하지와 이승만의 마지막 신경전이 그런 식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얼굴에 먹칠만 한 격이 되니 하지는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체면을 만회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다시 이승만에게 한국인의 장래와 민주정치, 교육 등에 관한 지도를 해 주겠다는 방침을 피력했으나 이번 역시 이승만이 수락하지 않았다. 하지는 분해서 피가 끓었으나 사태가 이미 자기에게 불리해졌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가 이승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의미에서든 무릎을 꿇은 것 뿐이라 생각하고 친서를 보냈지만, 이승만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하였다. 신익희는 돌아가는 정세를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하지가 사실상 굴복을 한 지금 이승만이 너무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 느껴졌다.

 의장실에서 국회의장단이 간단한 다과회를 베푸는데 하지를 초청했다는 말이었다. 처음 신익희는 속으로 크게 의아해했지만, 거듭 생각하자 이승만의 내심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승만의 그와 같은 태도변경과 하지의 굴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각자 모두 어떤 복선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익희의 그와 같은 예상은 적중했다. 이승만과 하지는 서로 만날 자리에서 상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지만,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다. 특히 하지는 명예욕을 가지고 있어서, 이승만의 환심을 산 다음 군정에 있던 정무위원들을 대거 정부수립에 참여시킬 작정이었다. 그는 점령군 사령관으로서의 명예를 연장시키기 위해서였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번번히 실패한 그는 마지막 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과 하지의 표면적인 싸움이 일단락 되었을 때, 다시 국회 안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승만이 아직도 양군 철수안을 주장하는 의원들을 당장 국회에서 추방해야 된다는 강경한 발언을 했기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