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

출생 1898년9월25일 사망 1959년 7월 29일

출신지 인천광역시 강화도

직업 독립운동가

학력 주오대학

경력       1950년 제2대 민의원   1948년 제1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강화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예전에 사회주의 운동을 하였으나 전향하여... 더보기

 
호는 죽산(竹山). 강화에서 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農業補習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강화군청 급사로 일하다가 상경해 기독교청년회(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간 복역했고, 1920년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 도쿄[東京] 주오대학[中央大學]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했다. 1921년 무정부주의에 심취해 비밀결사 조직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으나, 곧 회의를 느끼고 사회주의로 경도(傾倒)되었다. 1922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귀국해 10월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소련에서 열린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했다. 1923년초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속성과에 입학해 수료했고, 같은 해 9월 조선 공산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에 잠입했다.
1925년 4월 노동자·농민 운동의 총집결체인 조선노동총동맹, 청년운동을 주도한 조선청년동맹·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동맹 등을 결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26년 2월 상하이[上海]에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하고, 4월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을 조직해 책임비서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코민테른 극동국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27년 4월 이동녕·홍진·조완구 등의 독립운동지도자 24명과 함께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직을 맡았다. 같은 해 5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했고, 6월 국제적색노동조합(프로핀테른)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해 조선의 노동운동 방침을 밝혔다. 1929년 10월 조선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해 독립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1931년 12월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상하이 한인반제동맹을 결성했다. 1932년 11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피검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했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으나 해방이 되어 석방되었다.
해방직후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했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민주주의민주전선 인천지구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6년 반(反)박헌영 공개 서한을 발표하고 조선공산당을 탈당해 반좌익 성향의 정치노선을 견지했다. 이후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 1950년 제2대 민의원 부의장을 지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차점으로 낙선했지만 놀라운 득표로 인해 이승만 장기집권의 큰 장애물로 떠올랐다. 1956년 제3대 대통령후보로 다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해 11월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사건으로 체포(국가보안법 위반)되어 1959년 사형당했다.→ 진보당

 

정치적 박해의 표상으로는 해방전 공산주의 운동에 몸담았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꼽힌다.

그는 56년 3대 대통령선거에서 신익희가 급서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사실상 야권 단일후보가 되는 운명을 맞았다.

투표 결과 는 이승만 504만여표, 조봉암 216만여표.

절반도 안되는 득표였지만 조봉암의 부상은 장 기독재를 획책하던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결국 58년 1월12일, 이승만정권에 의해 간첩의 배후조종 등의 혐의로 체포된 그는 1년6개월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진보당 사건과 함께 빠질 수 없는 이름은 당시 담당판사였던 유병진 . 그는 58년 7월2일 1심 선고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된 조봉암에게 국가보안법위반만을 인정,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진보당 관 계자 전원에게 무죄를 내렸다.

이승만정권은 깡패들을 동원, 「타도 유병진」을 외치게 했 고, 결국 그는 58년말 판사직을 떠나야 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 묘 소재지-서울 중랑구 망우산 사색의길 동락천 약수터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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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석 뒤에 비문이 없다.

 

   

망우리 시민묘지에는 비문이 없는 묘소가 하나 있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죽산 조봉암 선생님 묘소지요.

59년 진보당사건으로 간첩혐의로 사형된 후 창령 조씨문중에서

지금까지 비문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이랍니다.


죽암은 비운의 정치인이지요.

제헌 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까지

탄탄대로였지요.

52년, 56년 대선 때 이승만에 맞서 선전했지만 낙선합니다.

그러나 무려 200만표나 얻었기에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올라섭니다.

독재자의 입장에서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나봅니다.

호시탐탐 노리다가 기어코 진보당에 붉은 색을 입혔고

죽산을 간첩혐의로 잡아들여 사형을 언도합니다.


죽산은 "정치적으로 조작된 사건이니 사형 아니면 무죄를 달라"

라고 당당하게 최후진술을 합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정치활동을 했다는 것밖에 없오.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 주시오."


그러나 그 마지막 청도 거부한 채 서대문 교도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됩니다.


밋밋한 비문이 무언의 항의를 합니다.
 
'X'를 그린 마스크를 착용한 것 같습니다.

조작된 사건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빨리 복원되어 선생의 이력과 철학이 가득 채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다음에 다시 올 때는 술이나 한 병 사 가지고 와야겠습니다.

마지막 유언이나 다름없는, "술이 한잔 주시오"라는 소원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개발독재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을 이루었던 기반에는, 사실 이승만 정권 시절, 당시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 선생 등의 주도로 이루어진 농지개혁이 있었던 점을 상기해야 한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진행된 당시 농지개혁은 고질적 병폐였던 지주제를 청산하고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세계사상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공평한 자작농 국가에 설정하였다. 비록 얼마 안되는 땅뙤기이지만 땅의 주인이었기에 일할 의욕이 충만하였고, 이것은 새마을운동과 산업화의 정신적인 동력역할을 했다. 즉, 경영관리요소 중 동적요소가 작동하여 기업의 이윤극대화에 성공한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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